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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2.사회운동가 및 제 3 세계(8)토마스 모어

우광호 기자
입력일 2006-10-22 수정일 200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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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모어를 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힘 없는 이들이 겪는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시키는데 온 힘을 기울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타협도 거부한 ‘정치인의 수호성인’

자본주의-사유재산 비판한 ‘유토피아’ 저술

‘혼인 불가해소성’ 등 법 통한 복음정신 주장

당신 앞에 한 고등학생이 서 있다. 그 고등학생이 논술을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어떤 책을 추천하면 좋을까.

어떤 사람은 ‘삼국지’를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도 있다.

이런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험생 필독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바로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의 ‘유토피아’(Utopia)다.

가상의 섬. 그곳에는 사유재산과 돈이 없다. 빈곤이 없고 누구나 일을 한다. 모어는 이상세계를 그렸다. 어쩌면 모어는 ‘하느님 나라’를 유토피아에서 찾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기록을 살펴보면 모어는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철저한 신앙인이자,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런 모어를 “일생을 두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고 평했다.

빈곤 계층 위해 헌신

1477년 2월7일 영국 런던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모어는 당시 최고 명문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 법률가로서의 길을 걷는다. 한때 사제직에 관심을 갖기도 한 그는 일생동안 기도와 단식을 게을리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신앙 중심의 삶을 살았다.

런던 시 전속 법률가가 된 그는 공정한 변론과 빈곤 계층을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1516년 당시 영국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악의 근원으로서 사유재산 폐지를 지적한 저서 ‘유토피아’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영국 재무 차관과 하원의장직을 역임한 모어는 1529년 영국 최고 대법관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재판정에서 그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그리스도교 문명의 법률적 세습 자산에 대한 마땅한 존중, 국가와 맺는 관계에서 교회가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끝없이 강조했다. 법을 통해 정의와 복음 정신이 살아 숨쉬는 국가를 만들려 한 것이다.

양심 지키다 처형 당해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영국 왕이 스스로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것. 결국 모어는 1531년 영국 왕을 영국 교회 수장으로 인정하는 수장령 선서를 거부하고 대법관에서 사임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533년 영국 국왕 헨리 8세는 케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을 왕비로 책봉한다. 모어는 당연히 이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분노했고, 1534년 4월17일 왕의 권위를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모어를 런던 탑에 감금했다.

양심을 더럽히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그의 강직함을 꺾기 위해 국왕은 온갖 심리적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모어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에게 강요된 선서를 일관되게 거부했다. 수장령 선서는 전제 정치의 길을 여는 정치적, 교회적 타협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1535년 반역죄 죄목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시 모어의 죽음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죽음을 두고 “그는 영혼이 눈보다 깨끗하고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나 영국이 다시 가질 수 없는 천재였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1935년 성인 품에

교회는 그를 1935년 성인 품에 올린다. 그리고 2000년에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토마스 모어를 정치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며 “변함없는 도덕적 고결함, 영민한 정신, 개방적이고 재치 있는 성격, 출중한 학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던 그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힘없는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는 사람들의 해악을 막고 정의를 증진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신도로 살며 그리스도교 복음 정신의 현실화를 위해 노력한 토마스 모어를 ‘교회 속 그리스도인’이 아닌 ‘역사 속 그리스도인’으로 본 것이다.

그 역사 속 그리스도인이 쓴 편지 한 통이 가슴을 아련하게 한다. 모어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1534년 어느 날, 런던 탑 감옥에서 자신의 딸 마르가리따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하는 마르가리따야, 내가 고통을 잘 참아 낸다면 이것을 내 인내심의 공로를 훨씬 초월하는 주님의 쓰라린 수난의 공로와 결합시키시어, 내가 연옥에서 당할 고통을 줄여 주시고 천상에서 받을 상급을 늘려 주실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맡기겠다. 그러나 내 잘못 때문에 버림받은 자 된다 해도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찬미와 영광이 될 것이다.

내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에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하지 말아라. 하느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 어떠한 일도 생길 수 없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겉보기에 그것이 나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광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