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43】교회의 일치와 평화-치프리아누스의 ‘가톨릭 교회 일치’에서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가톨릭대학교
입력일 2006-02-19 수정일 200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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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를 위해 형제들끼리 먼저 대화하고 화해해야 한다. 사진은 올 1월 20일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린 그리스도인 일치주간 합동기도회.
“서로 다름 인정하며 마음열어야”

[본문]

“우리가 그리스도의 상속자라면 그리스도의 평화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 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고 마음이 온순하며, 솔직한 말을 하고 사랑으로 화목하며, 일치의 고리로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이러한 일치가 있었고 새로운 백성인 신자들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 안에는 이러한 일치 정신이 약해지고, 관대한 활동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치프리아누스 ‘가톨릭 교회 일치’ 24∼26.

[해설]

베네딕토 16세와 함께 튀빙겐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한 한스 큉은 “종교간 평화 없이 국가간 평화 없고, 종교간 대화 없이 종교간 평화 없으며, 종교들의 근본 탐구 없이 종교간 대화 없다”고 말하였다. 세상이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부드럽지 않은지 종교간의 평화를 이루고자하는 한스 큉의 희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꿈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한국의 여러 종교는 황금 분할이라 할 정도로 고르게 분포되어서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이 포괄적인 종교성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한스 큉이 이처럼 절박하게 말한 내용을 심각하게 느끼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속살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렇지도 않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신자들의 보이지 않는 서로 뿌리 깊은 선입관, 적대감과 갈등으로 표출되는 비방은 유치찬란할 정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의회 문헌이 불교나 이슬람교를 대화의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개신교)를 일치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공유하며,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사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개신교 신자들을 갈라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종교간의 화해와 일치를 강조한 이후 개신교와의 협력을 모색하면서 기존의 배타적 입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 결과 화해 노력은 여러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상황은 이러한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 듯 하다.

교회 일치에 대한 접근 방법이나 노력은 교회 일치 운동을 소개하거나 교회 문헌을 이해시키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더구나 교회가 일치를 위한 규범을 실천하도록 촉구하고 있음에도 실제로 신자들은 일치 운동에 대해 관심과 이해가 거의 없다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상대방의 티끌이 아닌데도 티끌로 여겨 침튀겨가며 서로 비방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히 개신교와 가톨릭은 교의 문제를 비롯하여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관점이 있다. 이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외의 인간적인 결점으로 생겨난 모든 요소에 관해서는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둘째 회기 때 개신교 신자들에게 한 말에서 스스로를 낮춘 포용적 자세를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교회 분열의 책임이 있다면, 우리 가톨릭교회는 하느님께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갈라진 형제들에게도 용서를 청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선언을 받아주시고 우리 모두가 참다운 형제적 평화를 되찾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낮은 아니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자체에도 여러 교파가 있는 개신교에 기대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조금 무리인 듯 하다. 또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보수적 배타성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가톨릭교회에 기대를 걸고 싶다. 여하튼 이 기대에는 자기 것으로 여길 수 있는 많은 것을 내놓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뼈 깎는 고통과 불편이 수반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한국 그리스도교는 남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사랑을 가르치기 전에 형제끼리 먼저 대화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 일치에 관한 추상적인 거대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어떻게 일치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도 우리는 같은 하느님/하나님을 믿는 타 교파에서 출간한 책을 읽을 때 껄끄러운 것이 한 둘이 아니다. 더구나 몇 년 전 가톨릭 연구소에서 일할 때 개신교 동료 학자가 타르굼 성서를 번역하면서 하느님/하나님을 사용하지 못하고 ‘엘로힘’이나 ‘주님’으로 사용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니 용어라도 일치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나라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신명(하나님/하느님)을 비롯하여 성서의 명칭, 신학 용어, 심지어 인명과 지명도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회이다. 서로 상대 교파의 용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러한 배타심은 그리스도인의 일치 정신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작지만 엄청난 문제에 일치를 이룬다면, 이는 이 보다 더 큰 문제를 일치시킬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한 사람의 바람은 그냥 꿈이다. 그러나 수천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면 그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두 교파의 신자들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도 일치를 위한 꿈을 함께 꿀 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고대 교회에도 분열이 있었고 교부들은 교회를 일치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교부들의 지혜를 흉내내어 보았다.

하성수·한국교부학연구회·가톨릭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