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480?~547?)는 사실상 가리워진 인물이다. 천생 수도승인 그는 자기 업적의 뒤편으로 물러서서 자기를 가리는 데 상당히 성공한 편이다. 그렇다고 우리 눈에 완전히 숨어 버리지는 못했다. 그레고리우스 대교황(540~604)이 남긴 전기 때문이다(「대화집」 제 2권). 그리고 스스로 남긴 유일한 작품인 「수도 규칙」 역시, 깊은 눈매를 지닌 이들에게는 그의 웅숭깊은 사람됨을 엿보게 해 준다.
출세 수단으로서의 학문 거부
어려서부터 「노인의 마음」(cor senile)을 지녔던 베네딕도는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넉넉한 집안 출신으로, 젊어서 공부를 위해 로마로 떠났다. 그러나 일체의 학업에 몹시 환멸을 느낀 그는 중도에 공부를 작파한다. 출세와 향락의 수단으로서의 학문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참된 출세, 즉 「출세간(出世間)」을 향한 여정이 시작되는데, 그레고리우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분은 유식한 분이시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셨고, 지혜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대화집」 2, 1).
세상 지식을 초월하여 사람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신령한 지혜의 길, 이른바 「절학무우(絶學無憂, 「노자」 20)」의 영적 여정에 접어든 것이다. 이어지는 「대화집」의 이야기는 수많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어 자칫 현대인의 눈에는 가소롭게 여겨지기가 십상이지만, 성서와 고대 교부들의 어법에 밝은 사람이면 그 기적 이야기들이 깊은 속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느님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서는 성인들을 통해 현현(顯現)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현현이었듯,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신비의 현현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몸과 삶이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있어서 베네딕도는 바로 그런, 하느님 말씀의 투명하고도 빛나는 반영이었다.
그래서 그는 베네딕도를 「하느님의 사람」(vir Dei)라고 부르며, 그가 행한 수많은 기적 이야기를 통해 구약과 신약 성서의 말씀이 어떻게 면면히 한 인간의 삶에 육화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첫 기적은 로마에서 물러나 유모와 함께 한적한 마을에 정착하여 살 때 생겼다. 유모가 빌려온 체가 떨어져 두 조각으로 부서지고, 유모의 눈물에 측은지심이 북받친 베네딕도가 기도로써 체를 원상복귀 시킨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된 베네딕도는, 이 찬사를 피해 본격적으로 수행자의 길에 접어든다.
독살 음모, 사랑으로 감싸
수비아코 골짜기의 한 동굴에서 3년간 은수 생활에 정진하며 가혹한 영적 투쟁 끝에 마침내 믿음직한 영적 스승으로 드러난 그는 인근 수도원의 아빠스로 불려간다. 그러나 느슨한 생활에 익숙해있던 그곳 수도승들은 자기들이 모셔온 새 아빠스의 복음적 긴장과 활력을 견딜 수 없어 독살 음모를 꾸미게 된다.
독을 탄 포도주 잔이 그의 강복으로 깨어져 고약한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순간에도 그는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화한 얼굴과 평온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하느님 안전에서 당신 자신과 함께 홀로 지냈다』.
그러나 이렇게 공명심(체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찬사), 육욕, 그리고 분노와 공격성이라는 내면의 적을 극복한 베네딕도 곁에는 이내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고, 그는 수비아코 골짜기에 열두 수도원을 짓고 형제들의 안내자가 된다. 그러나 시기심에 불탄 인근의 한 사제가 그를 독살하고 형제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베네딕도는 다시금 맞은 이 시험에서 이전 보다 월등히 큰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니, 독살 음모가 탄로난 후에도 『자기 자신보다 그 불행한 사람을 위해 더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베네딕도가 마침내 몬테 카시노로 옮겨와서 「산 위의 마을」과도 같은 대 수도원을 짓게 된 때는 이렇게 악습과 싸우는 시기가 모두 끝나고 영적인 절정기를 맞았을 때였다.
「대화집」은 이후에도 여러 기적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누이 스콜라스티카 일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인근 수녀원의 책임자로 있던 누이가 찾아와, 둘은 수도원 밖의 한 집에서 밤이 이슥해지도록 거룩한 대화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가지 말고 밤새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청하자 펄쩍 뛰는 오빠 앞에서 누이는 천연스레 기도를 바치고, 그러자 마른하늘에 난데없이 천둥 번개와 함께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이리하여 거룩한 오누이는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레고리우스는 스콜라스티카가 베네딕도보다 『더 강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맺고 있다. 『더 많이 사랑하였으므로 더 능했도다』. 복음적 강조가 묻어나는 의미심장한 유머가 아닐 수 없다.
규칙서에 임시성 부여
그레고리우스는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두고 그 단순명쾌한 필치와 함께 무엇보다 「훌륭한 분별」을 상찬한다. 사실 그의 규칙서는 많은 부분 「스승의 규칙서」(익명의 「스승」을 일인칭 주어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 그리 부른다)의 발췌 요약이다. 그리 길지도 독창적이지도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수도 생활의 모든 면을 세세히 규정하려 든 「스승」과 달리, 자기 규칙서에 일종의 임시성을 부여했다. 큰 줄기만 규정하고, 나머지 세세한 부분은 다양한 지역 수도원의 아빠스들 재량에 맡긴 것이다.
사실 타인의 분별력을 신뢰해 주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큰 분별력일 것이다. 바로 이런 「임시성」으로 말미암아 「베네딕도 규칙서」가 가장 널리 그리고 오래 지속된 규칙서가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얼굴없는 성인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베네딕도의 정신과 규칙을 살고 있는 수많은 베네딕도회원들의 삶이야말로 「얼굴없는 성인」인 베네딕도의 얼굴을 가장 잘 비추어주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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