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오직 하느님 영역 인간 존재도 주님 뜻으로 가능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부활을 믿었던 바리사이적 해석 유형을 완전히 넘어선 새로운 ‘몸의 계시’를 완성했다. 죽음은 인간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생 굽이굽이를 거치면서 ‘잘 살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고민할 뿐이다. 가끔씩 마주치는 이 고민이 죽음의 진리에 자신을 놓는 성숙한 주체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복된 전망을 향해 신성한 진리를 갈망하고 엿보게 된다. 결국 해결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가 도전처럼 하늘을 향한 문을 여는, 즉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 열리고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인식,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STh.,II-II,q.1,a.6)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인간이 일시적이고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하느님을 말함)에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것에서 드러나고, 현실에서 인간을 상승시키는 단계로 작용하여 사물의 해방을 넘어설 수 있는 경향을 얻게 한다. 여기에서 얻어진 체험은 지상 삶에서 그 어떤 일치보다 앞에 둔다. “오라”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네, 갑니다”라는 인간의 적극적 응답이 삶에서 드라마틱하게 일어나고, 그러한 삶은 자신의 모든 것에 중심이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진리를 매일 타자를 향해 전달하려 한다. 그것이 곧 사랑(Amor)에 응답하는 삶이다. 이런 사랑의 전달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역사에 들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은 희망을 낳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타자의 삶에 주체로 들어가는 변화를 겪는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인’ 관점에서 “희망과 선은 미래에만 유효하고, 오로지 희망을 품고 있는 그 사람에게만 적용된다”고 제한적으로 보았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희망을 사랑이라는 덕행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사랑의 보편성에서 희망의 보편성을 끌어낸 것이다.
부활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인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부활’에 관한 답은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이미’와 ‘아직’ 사이의 틈은 사라졌고, 죽음과 삶, 허무와 존재가 새롭게 연결됐다. 그래서 종말론은 관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격에서 시작된다. 구원을 개인의 이기주의 충족이 아닌 인격적 관계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다. 내가 그분을 향해 돌아서야 하는 이유요, 오늘 내 삶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한은 끊임없이 무한을 알려고 한다. 유한이 무한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무한이 품고 있는 속성, 곧 ‘사랑’으로 가능하다. 사랑은 유한에서나 무한에서나 같은 속성이고,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 저곳에서 열매로 드러난다. 이 땅에서 유한인 우리는 불완전할 수 있지만, 그날을 맞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몸의 혼인성은 무한을 향해 열려 있고, 그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어떠한 성소의 길을 가든 예외는 없다. 모든 이가 전 생애를 통해 부활 상태의 몸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응답의 삶이요 아름다운 파스카적 삶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기능이 다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로 부르심이요, 완성을 위한 전 존재의 부름이다.(「사목헌장」 18항 참조) 인간은 두 가지 차원, 즉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의 존재와 실존 모두를 하느님께 기원을 두며, 하느님께서 존재하길 원하시고 유지하고자 하시기에 존재할 수 있으며, 부활로 부르시는 그날 자녀로서 되돌아간다. 영원하고 유일무이한 ‘오늘’로 들어간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