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 제1독서 사도 4,8-12 / 제2독서 1요한 3,1-2 / 복음 요한 10,11-18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