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 돈에 눈멀어 하느님 뜻을 놓치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입력일 2022-08-30 수정일 2022-08-30 발행일 2022-09-04 제 330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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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지혜 9,13-18 / 제2독서  필레 9ㄴ-10.12-17 / 복음  루카 14,25-33
돈이 하느님 자리 차지해 버린 현실
재물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 버리고
십자가 짊어지며 예수님 따라가길

바르톨로메오 파사로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성 예로니모와 성 프란치스코’.

돈 이야기는 성당에서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신부님들이 빙빙 돌려가며 아쉬운 소리하기 보다 대놓고 돈 내라는 게 되레 듣기 편하다는 분도 계시긴 합니다. 경조사에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계좌번호와 송금으로 갈음하기도 하는 세태라 예전보다는 돈 이야기가 더 쉬울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이야기는 여전히 어려운 화제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은 그 힘든 돈 이야기를 피하기는커녕 줄기차게 전합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오늘 복음에서부터, 다음 15장에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 15,8-19), 돈 때문에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가 나오고, 불의한 청지기가 돈 쓰는 이야기,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16장까지 이어집니다. 대체 돈이 무엇이기에 예수님마저도 돈 이야기를 그렇게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도 돈이 주는 안락함과 편리함을 모르지는 않으셨을 터입니다. 예수님은 돈푼깨나 있는 사람, 내로라하는 유력 인사들과도 곧잘 어울리셨고 그 덕을 보셨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모신 제자 요셉은 ‘부유한 사람’(마태 27,57)이었고, 루카복음의 저 유명한 세리 자캐오도 돈이라면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으며, 훗날 순교자로 공경받는 니코데모(요한 3,1) 역시 당시 유다사회 권력의 최정상부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힘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했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루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 3년 동안 생업을 위해서 뭘 하셨다는 기록이 없는데, 여러 제자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루신 그 모든 일에 돈을 내고 도와드린 이들이 분명 한몫했겠지요. 예수님도 돈을 무작정 죄악시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알 듯이 돈은 편리하고 좋은 것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라”는 우스개가 나돌 만큼 돈의 위력은 강력합니다. 돈은 말 못하는 이가 말하게도, 불구자가 일어나게도 합니다. 예컨대 외국어라고는 땡큐, 쏘리 단 둘 밖에 몰라도 돈만 내면 외국인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원하는 대로 딱딱 맞춰주더라는 경험, 적지 않은 분들이 해보셨지요. 진시황이 찾던 불로장생의 영약까지는 아니지만, 돈을 들이면 칠순팔순에도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얼굴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돈을 제대로 쓰면 그 위력이 배가됩니다. 돈이 있으면 가난 때문에 꿈을 접은 젊은이에게 희망의 싹을 틔워줄 수 있고, 질병의 고통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건강을 선사할 수 있으며, 돌봐줄 이 없는 노쇠한 이들에게 자상한 돌봄의 손길을 붙여 줄 수도 있습니다. 불화와 갈등 속에 있던 이들이 돈을 기화로 화해와 용서에 이르는 기적을 볼 수도 있습니다.

돈의 힘이 이렇게 크다 보니.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리에 돈을 앉힙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9년 출판된 「대교리문답」에서 하느님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이란 사람들이 소망하는 모든 좋은 것, 온갖 시련의 피난처가 되는 대상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매달려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당신의 하느님입니다.”

이 구절에 비추어 개신교 신학자 스캇 구스타프슨 목사는 돈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오늘의 현실을 개탄합니다. 많은 이들이 소망하는 모든 좋은 것, 온갖 시련의 피난처로 하느님 대신 돈을 생각하고, 돈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사랑과 행복을 꿈꾸면서 그 필요충분조건으로 돈을 먼저 생각합니다. 중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돈을 벌어다 주는 것뿐인 양 돈을 쫓아갑니다. 노인은 노인들대로 기댈 데 없는 노년의 삶을 돈이 지탱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강화시켜 갑니다. 돈이 수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삶의 목적으로 삼아버린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힘들 때도 돈을 먼저 생각하지 하느님은 뒷전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돈에 마음이 뺏겨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면서 그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겠다고 흔히 끌어다 대는 핑계가 가족애입니다. 직무에 관련해서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은 사람들이 그 돈으로 제 자식 교육비를 충당하는 일은 이제 놀랍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짐짓 청년 세대의 고통을 위로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질타하던 사람들마저 막상 자기 자녀들은 자기 수입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호화 유학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자녀들의 ‘스펙’을 내세우며 옛 계급사회의 귀족이라도 된 양 과시하는 허세는 또 어떻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예나 이제나 돈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고 돈에 가려서 하느님의 뜻을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매섭게 지적합니다. 앞날을 계획하고 인생을 설계하면서 돈을 기준으로 삼는 단견을 꾸짖습니다. 이기적인 재물 욕심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지고한 가족애 때문이라고 가장하면서, 실은 재물이 자신의 명예와 안녕과 건강과 행복을 지켜줄 것이라는 맹신을 따르는 모습을 복음은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자기 가족과 자기 목숨을 명분으로 삼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돈을 좇는 위선을 떨치라고 말합니다. 병들고 약해서 내게 십자가로 얹혀사는 사람들을 버리고 싶은 유혹에 맞서라고 권고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