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오늘의 공동생활 - 공동생활의 사회철학적 고찰 / 김형효 교수 강연초

김형효 교수
입력일 2020-09-07 10:25:41 수정일 2020-09-07 10:25:41 발행일 1972-12-03 제 843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현대는 물질만능의 인간 소외시대
진정한 대화는 영혼의 순수로부터
대화는 상호 존중과 겸손으로부터
【서울】현대는 고도화된 물질문명에 의해 인간을 상품화한 물질만능주의 시대요 인간 존엄성을 외면한 윤리도덕 타락과 대화 불존 이웃 부재의 인간 소외시대라 한다. 지난달 가톨릭여학생관은「공동생활에 있어서의 사회철학적 고찰」이란(김형효 교수) 강연을 통해 참된 이웃의 의의와 현대 특성 중의 하나인 대화 부재의 원인과 그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이날 발표한 김 교수의 강연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대야말로『…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까 10ㆍ29)』하고 율법 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던 이 명제를 우리들 자신에게 던질 때라고 본다.

현대는 물질만능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을 물건, 또는 이용 가능한 일개 도구로 착각하기 쉽다.

구체적인 이웃의 문제는 먼저 사람들 간의 접근의 첫 단계인 대화의 문제를 생각한다.

현대인은 외부로는 이해관계가 뒤얽힌 전쟁ㆍ내란ㆍ유혈 등 갖가지 사회악들과 더불어 내부로는 탐옥ㆍ이기주의ㆍ우월감ㆍ열등감ㆍ분노 등으로 내적 갈등을 항상 일으키고 있다.

또한 인간은 사고ㆍ연령ㆍ성별ㆍ직업ㆍ성분ㆍ성격 등 제 개인의 격차에 따라 그들 나름의 판단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에게는 대화의 필요성과 아울러 타협이 종용된다.

흔히들 오해를 극복하는 수단의 일환으로 토론을 제시하지만 이것도 자칫 종국적인 해결 방법은 커녕 오해의 장벽을 더욱 두껍게 쌓은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경우의 실패 요인을 분석하면 모든 사람은 각자의 경험 차이에 의한 각기 다른 이념을 갖고, 자기 경험만이 사실인 것처럼 자기 의견을 강요할 태세로 토론장에 임하기 때문이다.

이같이 주관적 사실에 의한 자기 확신은 자기만이 갖는 확신일 뿐 아니라 지나친 논리적인 이유, 추상적인 타당성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 태도는 참다운 대화를 파멸시키는 요인이 된다.

개인이 한 가지 주장을 고집하는 그 저의를 분석하면 ①타인에게 자기 확신을 부과하려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과 ②타인의 경험, 타인의 사고를 인정치 않으려는 오만한 태도에 기인된다.

이미 토론의 논쟁을 띤 형식을 초래했을 때는 이미 토론이 아니라 믿고 있는 어떤 진리의 이름을 빌려 일방의 승리와 타방의 패배를 판가름하는 일종의 언어전쟁이 된다.

그러면 토론을 성공적으로 이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피노자는『평화는 인간 영혼의 친밀감에서 탄생한다』고 했다.

마음의 평화가 없는 사람이 타인을 평화스럽게 대할 수 없듯이 대화하려는 영혼이 우선 진실로 순수해질 때 참다운 대화가 출발된다. 참다운 대화는 타인의 현존을 이해하고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기 경험 및 지식의 한계성을 승인할 때 이룩된다.

또한 우리는 대화에 임하기 전에 먼저 ①타인의 필요함을 인정 즉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겸손한 자세와 ②나보다 더 큰 세계에 하나가 되려는 의지와 신뢰 및 ③타인과 함께 제3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심적 준비가 요구된다. 우리가 상용하는 말을 하이덱가는「존재(영혼)의 집」이라고 정의 내렸다. 그는 존재란 근본적으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음을 전제하고 말은 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게 만들고 상징적인 인간영혼을 보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의 말은 베이컨이 주장한「시장의 우상」이론처럼 각자의 경험에 의해 구축된 거울 형태에 따라 상대방의 말의 원의를 변형시켜 오해를 낳게 하고 한낱 자기 이익을 위한 상업적 선전 도구물로 전락됐다.

그래서 현대는 어린애 같이 순수하게 자기 표현을 주장하는 순진한 영혼에게 상처를 입게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피흘림으로 낭자해진 이 영혼에게서 인간의 휴매니티를 발견하게 되며 또한 이들이야말로 그리스도 왕국을 향해 말없이 가고 있는 역군임을 인식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우리들 자신은 과연『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숙고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강도에게 상처 입은 사람을 돌봐 주었던「착한 사마리아인」 (루까ㆍ10ㆍ33)만이 참된 이웃이었음을 명시하셨다.

삭막해지는 우리들 사회생활에서도 이「사마리아」인의 자세만이 우리의 순수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김형효 교수

기자사진

김형효 교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