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전남 고흥군 동강면 죽암리 간탁사업장 신자 인부 20명, 약속한 땅 1정보씩 받게 돼

입력일 2020-01-10 16:57:54 수정일 2020-01-10 16:57:54 발행일 1977-04-01 제 1051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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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 거둔 집념의 투쟁 2년
피땀의 노력 대가 찾아
발뺌하는 사업주 상대로 끈질긴 투쟁 끝에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세대 1정보의 땅을 약속받고 때로는 생명을 건 위험을 무릅쓰며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장에서 돌과 흙을 지어나르기 2년. 그리고 그 땅을 찾기 위한 투쟁 2년 만에 신자 20세대는 땅을 주겠노라는 약속을 얻어내는 데 성공, 이 가난하고 힘없는 신자들은 집념으로 이겨낸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집념의 드라마가 펼쳐진 무대는 전남 고흥군 동강면 죽암리 간척사업장.

죽암리와 남양면 망주리 사이의 5백m 바다를 막아 1천6백 정보의 간척지를 얻는 이 사업에 1966년 3월 고흥본당 신부가 선발한 극빈신자 20세대가 완공 후 1정보씩의 땅을 받기로 하고 취로하면서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의 대가를 찾으려는 긴 투쟁이 펼쳐진다.

당시 이 사업을 착수한 사업주 김기세라는 사람은 고흥본당 도란(애란인) 신부와 신자 20세대를 취로시키고 완공 후 세대당 1정보의 땅을 무상 분배한다는 조건으로 신부의 추천을 받아 가톨릭구제회의 양곡 지원을 얻었다. 민간의원단체 주관하에 추진된 소위 미공법 480 3관(三款) 사업으로 진전되어 절강을 눈앞에 둔 죽암 간척사업은 취로 2년 만인 68년 민간원조단체와 정부의 협약에 따라 정부사업으로 이관되면서 (삼관사업) 일단 중단되었다

작업장 한구석에 판자집 공소를 짓고 이곳을 숙소 삼아 바다와 싸우던 신자 20세대로 훗날 공사가 재개되면 땅을 주겠노라는 사업주의 약속을 믿으며 살 길을 찾아 흩어졌다.

그 후 1975년 이 사업이 다시 김세기씨에게 넘겨져 공사가 재개되자 정착민들은 김씨를 찾아가 약속한 땅의 배분 확인을 요구하자 이 사업은 정부와의 새로운 계약 아래 시작된 것이라면서 군수에게 미루고 군수는 정부가 받기로 한 17%의 지분을 나눌 때 참고하겠다는 정도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사업주 김씨가 1정보 분배가 조건인 가톨릭구제회 양곡 지원 사실조차 부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양곡은 취로자들이 직접 메어 나른 것만도 여러 차례인데 그것을 부인한 것이다.

이때부터 김종성씨(53ㆍ바오로)를 대표로 내세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군수 도지사 보사부 장관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해줄 것을 진정하는 한편 당시 양곡 수송을 맡았던 대한통운회사의 부산과 목표 여수 지점의 서류 창고를 4개월간 뒤져 66년 5월부터 67년 말 사이에 전남 벌교지점을 통해 양곡 9백 톤이 수송된 것을 확인했다. 이를 근거로 지난해 5월 다시 보사부 장관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자 5개월 만인 10월 고흥 군수로부터『자활지도사업에 관한 법규에 의거 영세 취로자에게 공정 분배할 것』이라는 믿을 만한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취로 10년 만에, 투쟁 2년 만에 얻어낸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착민들이 겪어야 했던 서러움과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군수를 면회하려고 5일씩이나 부속실에서 눈총을 받은 적도 있고 보사부는 도에, 군은 도에, 도는 군에 처리를 미룰 때마다 탁구공처럼 관청 사이를 뛰어다녀야 했던 것.

대표 김종성씨는『당초 영세 취로인의 정착을 도우려는 정신과 협약에 따라 마땅한 대가를 달라는 소박한 요구가 무시될 때마다 좌절과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지만 기필코 약자도 권익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웠다』고 긴 악몽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