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거짓된 언어에 쉽게 속는다. 최근의 경색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회색」 또는「사꾸라」가 필요하고 그것이 마치 정당한 것인양 이 나라 언론과 몇몇 필진에 의해 왜곡, 강변되고 있다. 어느 교수는 한 일간지를 통해 영화「미션」의 등장 인물을 본능ㆍ양심ㆍ현실이라는 세 가지 가치로 해석하면서 양심에 앞선 현실적 선택의 우위성을 교묘하게 주장한 바 있다.
정당성을 가리기 힘든 갈등이나 대립의 화해를 위해서는「회색」도「사꾸라」도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한편이 불의하고 억압적이고, 다른 한편은 그로인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판단이나 선택없이 어중간하게 서서「회색」이 되고 「사꾸라」가 되라는 것은 가치관 부재의 기생 인간이 되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체제의 일부로 편입된 오늘의 제도언론은 사실보도는 고사하고,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민주와 독재의 가운데 지점에서 화해를 청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단언하건대 비도덕, 불의, 부정, 독재적 억압은 거부의 대상이지 타협의 대상은 아니다
예수님과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이「회색」이고「사꾸라」였다면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승리는 없었듯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에게는 도덕적가치 곧 양심의 우위가 강조되어왔으며 역사는 옳고 그름의 분명한 가치 판단을 요구해 왔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마태 3.7~8) 하신 말씀이 오늘 우리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4월 5일 字 서울교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