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신포장학회」설립한 이충복 할아버지

전정현 기자
입력일 2019-08-26 17:18:34 수정일 2019-08-26 17:18:34 발행일 1987-03-01 제 1545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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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생을 장학 사업에 헌신”
79年부터 매년  대학생 50명에 장학금
“가난 때문에 학업포기한 한 풀고파”
『장학금을 받으면서 어렵게 공부했던 학생들이 졸업 후 의젓한 사회인이 되어서 찾아올 때면 손자가 잘된 것처럼 흐뭇하기만 하지…』

젊은 시절 피나는 고생으로 모아 둔 재산 3억원을 출연「신포장학회」를 설립, 지난 79년부터 매년 50여명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오고 있는 이충복 할아버지(92ㆍ토마)는 장학회를 거쳐간 학생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지난 1월에는 서울 정릉본당에 5백만원을 기증, 본당장학회 설립에도 큰 몫을 담당했던 이충복 할아버지가 장학회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도포기 해야만 했던 쓰라린 아픔 때문이다.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봉강동에서 태어난 이충복 할아버지는 선친 때부터 기울기 시작한 가세 때문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에 상경, 입학했던 중학교를 도주에 포기해야 했다. 『학업을 포기하고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장사를 시작했지. 그러다가 일본까지 흘러 들어갔고 거기에서 양복 재단기술을 배운 덕택으로 약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는 할아버지는『해방 후 서울에서 양복점을 개업, 작은 돈이나마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장학회를 만든 것은 단순한 동기였지만 장학금은 꼭 함경북도 출신의 후손들에게만 지급한다』는 원칙을 세운 할아버지는 일제탄압과 6ㆍ25등 을 거치면서 겪어야 했던 실향민의 아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소 알고 지내던 故 장면 박사의 권고로 환갑나이에 뒤늦게 천주교에 입교했지만 노령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 본당에서도 보이지 않은 숨은 일꾼으로 활약해왔다.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을 철칙으로 삼고 90평생을 살아온 이충복 할아버지는 신포장학회를 통해 더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금도 장학회확장사업에 많은 애착을 갖고 있다.

5남매를 키워 출가시킨 뒤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 4동 305번지에 부인 김금예 할머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충복 할아버지는『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라며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전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