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종교학회가 펴낸「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죽음에 대한 각종교의 입장을 소개하고 있어 죽음관을 통해본 다각적이고 독창적인 삶의 사고를 엿보게 한다.
죽음을 생각해보는 위령성월을 마무리하며 제종교의 죽음문제 이해도 죽음을 재조명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본다.
이에 본보는「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수록된 불교ㆍ힌두교 등 각종교의 죽음문제를 요약ㆍ소개한다.
무속
무속집단은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 간다고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세계를「이승」과「저승」으로 대별한 것이다. 또한 저승은「능수능장법」이라 하여 죽음세계를 맑고도 깨끗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죽는다는 전제 속에서 마련된 것이라 볼 수 있고 이승ㆍ저승의 이원론적 인식은 무속집단이 인간의 생사에 많은 관심이 있었음을 제시해준다.
무속집단은 인간이 초혼ㆍ이혼ㆍ삼혼의 치사를 따라 저승으로 향한다고 이해했다. 이는 인간의 혼을 셋으로 인정했음을 알려주는데 혼의 3가지 개념은 죽은 육신이 이승에 머물러 있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면서 죽은 인간이 저승으로 갔거나 또는 간다고 믿어야 하는 모순을 극복키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무속집단은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배려도 저승ㆍ이승도 아닌 떠도는 영혼으로 남아 비명횡사한 것을 나쁘게 생각했다. 또한 이들을 인간이 죽으면 저승에서 영원히 살며 죽은 후에 종을 달리하여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영생ㆍ환생의 관념을 다 가졌다고 볼 수있다. 윤회의 경우 동ㆍ식물로만 태어나게 되며 인간의 삶은 일회적이라는 관념을 지녔다.
불교
불교에서의 죽음문제는 죽음을 불가피한 현실로서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출발한다.「세속으로 부터의 초연」이 중심태도였던 만큼 사후의 문제보다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 주관심사가 된다.
삶에도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을 추구했으며 이것이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 번뇌를 불어 꺼버린다는 열반인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존재를 4 유(有)로 표명했는데 생명이 결정되는 찰나를 생유(生有) 임종직전까지를 본유(本有) 최후에 임종하는 찰나를 사유(死有) 이 사유로부터 생명이 결정되는 생유사이를 중유(中有) 라고 했다.
여기서 중유가 가시적인 임종이후의 상태 즉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불교신자들의 49세는 특히 중유를 설정한데서 기인한다. 중유시에 출생의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수차례 죽고 태어나는 식으로 7일이 경과하는데 이때 최대의 기간은 7일씩 7번 즉 49일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4유설정과 중유를 삶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은 죽음을 단멸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드러내며 죽음이란 삶의 연장선에 있는 하나의 추이일 뿐인 것이다.
불교는 죽음극복에 있어 죽음의미의 철저한 이해를 좋은 방도로 소개한다. 죽음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있으며 그 해결도 마음의 자세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죽음의 문제란 곧 마음의 문제라고 하며 궁극적으로 무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때 그문제도 해결되는 것이다.「죽음은 곧 삶이며 열반」이라는 인식의 대전환 자체가 죽음의 극복인 것이다.
힌두교
힌두교의 기본구조는 윤회와 해탈이다. 변화무쌍하고 어두운 죽음ㆍ고통이 있는 이 세계를 윤회라고 부르며 무한ㆍ불사ㆍ광명ㆍ행복의 궁극적 무조건적 존재의 차원을 브라흐만ㆍ아뜨만ㆍ열반이라고 부른다. 태어남과 죽음의 순환적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윤회의 근원은 무지 혹은 마-야이며 윤회를 지배하는 인과법칙이 까르마이다.
무지가 있는한 욕망과 까르마가 있고 그로부터 생사의 윤회가 지속 된다.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불사의 브라흐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이며 해탈을 이루는 방법과 수련이 요가이다.
죽음문제에 있어서 힌두교는 자신이 지은 까르마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가장 합리적으로 수용했다. 윤회설의 철학적 합리화가 힌두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있다.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요구를 수용하며 또 그 들사이에 조화를 추구하는 힌두교는 인생의 목적을 쾌락ㆍ재물ㆍ의무ㆍ해탈로 꼽았고 그 중 해탈에 가치의 최종적인 위치를 주고있다.
불사(不死)란 단지 수명의 시간적 연장이 아니라 시간적ㆍ현상적「나」의 자발적 죽음을 통해 초시간적 절대적인「나」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세속적 제약과 조건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의 지평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슬람교
이슬람교에서는 죽음을 영원과 육체의 일체감의 소멸로 본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계명적 현상이며 생명이 현상태에서 훨씬 가치있고 숭고한 고차원의 다른상태로 이전되는 계기로 여기는 것이다. 생명이 육체에 대한 영혼의 집중이라면 죽음은 생명열의 소화상태이다. 육체의 삶은 영혼이 그것을 보살피는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기쁨이다. 알라의 보호속에서 그와 함께 교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승에서의 삶과는 비교가 되지않는 은총의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이슬람교에서의 죽음은 현세에서의 모든 행실에 대한 일단락이며 보다 고차원적인 삶으로 향하는 새로운 단계이다. 현세는 내세에 비해 짧고 하위의 개념이지만 내세에서의 개인의 삶의 형태가 현세생활의 결과로 결정되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내세를 위한 준비기나 의미없는 시험기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최선의 삶이 요구되는 세계이다. 현세와 내세사이에 죽음이후 부호라의 날까지 지속되는 중간계를 설정하여 이곳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현세에서의 자신의 행실에 대한 인과응보를 경험케 하고 상위의 삶을 위한 부단한 진전의 시기를 마련하고 있다. 천국ㆍ지옥도 설정하고 있는 이슬람교는 지옥을 종말없는 영원한 응징만이 아닌, 영혼의 정화를 위한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