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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실료의 요람 마요르카] 스페인국민 신앙의 고향 꼼뽀스뗄라

스페인 현지취재=박태봉 현집국장
입력일 2019-07-19 15:28:09 수정일 2019-07-19 15:28:09 발행일 1988-03-06 제 159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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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전세계순례객의 발길 이어져… 
야고보사도 무덤순례가 꾸르실료 잉태시켜
태양과 정열의 나라, 투우와 플라멩고와 예술의 나라, 한때는 무적함대를 자랑하며 해지는 날이 없을 만큼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던 나라, 교회적으로는 성녀대데레사 이냐시오 로욜라와 같은 많은 유명 영성신학자들을 배출한 나라, 그리고 오늘날은 고대와 중세와 현대가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나라, 이처럼 스페인을 지칭하는 형용사들은 수없이 많다. 이것은 스페인의 역사가 얼마나 변화무쌍했던가를 짐작케 해준다.

국토의 위치가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접합부에 해당되는 유럽 남서부 이베리아반도의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은 지리적 위치때문에 옛부터 수많은 민족이 이동하는 육교구실을 해왔다.

이런 연유로 스페인은 유사이래 잡다한 민족이 침입한 결과 겔트족을 비롯 페니키아인, 로마인, 그리이스인, 게르만인, 사라센인 등으로 복잡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본래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라틴문화가 흥하던 곳이나 잡다한 문화의 세례를 받아 남부에는 이슬람적인 요소가 강하고 북부에는 게르만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스페인은 유럽문명과 오리엔트적 요소들이 전혀 위화감이 없이 한데 어울려 독특한 매력과 무우드를 빚어내고 있어 세계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스페인땅 어느 곳에서나 한눈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와 관련된 건축물들이다. 이것은 스페인의 가톨릭교회 역사가 얼마나 깊은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스페인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역사는 사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도 바울로와 야고보가 이땅에 전교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쨌든 4세기경에 이미 스페인 전국에 그리스도교가 넓게 퍼져있었다고 한다.

사도시대부터 스페인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1492년에 와서 이슬람교도들을 완전히 추방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수십세기를 내려오면서 이땅에 이식되고 접목된 잡다한 문화적 요소들과 융화되어 오늘날 화려하고 찬란한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스페인의 수많은 그리스도교 성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성지는 스페인 본국 북서단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곰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이곳에는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모셔져 있고 그 자리에 대성당이 세워져있는데 중세때부터 예루살렘과 로마 다음가는 이름난 성지로서 1181년 교황 알렉산델 3세가 이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베푼다는 칙서발표 후부터 매년 50만명이 순례했다고 전한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던 때로 유럽각지에서 피레네산맥을 넘어 몇달씩 걸려 이곳을 순례했으나 오늘날은 네개의 자동차 도로를 통해 수없이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옛부터 서유럽으로부터의 순례객의 왕래는 유럽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전달하는 하나의 통로가 돼왔다.

원래 인구 5만명 정도로 벽촌이었던 이곳은 중세때부터 밀려든 수십만의 순례객들로 인해 인근 여러도시가 발달했으며 현재는 국제공항이 있을 만큼 세계각지 순례객들로 붐비고 있다.

이 지명이 생겨난 유래는 목동이, 별이 멈춘 들판에서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발견했다는 뜻에서「야고보」,「꼴뽀스뗄라」는「들판의 별」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의 무덤을 발견한 때는 812~814년으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시 국왕 알풍소 2세는 그곳에 소성당을 짓게했는데 오늘날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대성당은 그로부터 2백년 후 건립됐다고 한다.

오늘날 스페인에서는 매년 야고보사도의 축일인 7월 25일「국가봉헌식」을 갖고있다. 이날 국왕부처는 스페인 국민을 대표해 사도의 무덤을 방문, 국가와 국민을 국가의 수호자인 야고보 사도에게 봉헌하고 한해동안 할일을 교시받는다.

사도의 교시는 산티아고 대주교의 교서로 발표되는데 국왕은 이를 국정에 반영해 오고있다고 한다. 이만큼 스페인은 정당이나 정치를 초월한 위치에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오늘날 4천만 스페인 국민의 신앙과 마음의 고향으로 일평생 예루살렘이나 로마는 가보지 못해도 이곳만은 꼭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란다.

무엇보다 산리아고 데 꼴뽀스뗄라 성지는 현재 세계 60여국에서 4~5백만명으로 추산되는 꾸르실료 운동과도 밀접한 곳이기도 하다. 물론 꾸르실료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마요르카섬이지만 이 꾸르실료 운동이 싹트고 개화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이곳의 성지순례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평신도들에 의한 교회쇄신운동 혹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단기 강습으로 흔히 일컬어지는 꾸르실료 운동은 1949년 1월 7일 마요르카 교구내에 있는 성호노라또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시작됐다. 이 꾸르실료는 1948년 8월 28일부터 4일간 마요르카섬에서 70만명 그리고 스페인 전국에서 6만명 등 76만명이 꼼뽀스뗄라 성지 순례를 가진후 4개월 후에 탄생을 보게된 것이다.

따라서 최초의 꾸르실료는 바로 꼼뽀스뗄라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을 안내하고 지도하기 위한 지도자 양성에서 출발되었기에 꾸르실료 운동과 꼼뽀스뗄라 성지는 어쩌면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흔히 지중해의 낙원, 꿈과 낭만과 휴양의 섬으로 일컬어지는 마요르카(Majorca)는 스페인의 해외영토 중 발레아레스제도의 네개 섬가운데 가장 큰섬으로 동서 100㎞, 남북 75㎞에 달한다. 지난달 로마인들이「크다」는 뜻으로 붙인「마조르카」에서 현재「마요르카」혹은「말료르카」(Mallorca)로 불리우는 이 섬은 옛부터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영주가 수차 바뀌는 공방을 거듭하다 1229년말 아라곤왕국의 하이메 1세가 아랍인들을 완전 정복한후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마요그카는 쇼팡과 여류작가 소르즈 상드와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으로도 이름이 나있다. 1838년 신병치료차 발데모사의 수도원에 방한칸을 빌어 살던 어느날 부인이 남장을 하고 외출한 사이 수도원 지붕을 타고 피아노 건반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작곡했다는「빗방울」은 불멸의 작품으로 남아있으며 그후 조르즈 상드는「마요르카의 어느 겨울」이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곳에「지휘자 안익태 선생의 거리」가 명명돼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오늘날의 마요르카는 상주인구 55~60만명에 불과하지만 일년사철 상춘의 섬으로서 매년 1천만~1천 2백만명의 관광객이 들끓고있으며 세계적인 국제선이 취항하고 있고 호텔만 1천 5백개가 넘는다.

마요르카의 주산업은 올리브, 아몬드, 오렌지, 레몬, 도자기, 해산물 등이었으나 요즘은 관광수입이 으뜸을 차지할만큼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돼있다.

바로이 섬에서 꾸르실료가 탄생한 것이다. 마요르카의 중심지인 팔마시에서 교외로 약 30㎞ㄸ러어진 산위에 위치해있는 성호노라또 수도원은 바로 이 꾸르실료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소성당 입구 한쪽벽에는「성신의 도움으로 이 세상 끝까지 전파되고 있는 크리스찬 생활의 첫번째 꾸르실료가 1949년 1월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마요르카교구 사무국은 1972년 11월 5일 이곳에서 개최된 세계 제3차 울뜨레야를 통해 하느님께 감사를 표한다」는 글귀가 돌판에 새겨져 있어 이곳을 방문하는 꾸르실리스따들에게 새로운 감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40년전 꾸르실료 운동이 처음 탄생했고 오늘날도 그 운동이 활활 타오르고있는 마요르카는 전세계 모든 꾸르실리스따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한번은 꼭 가보고 싶은 꿈의 섬으로 남아있다.

스페인 현지취재=박태봉 현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