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적 대립도 없고 더 이상의 지긋지긋한 전쟁도 없는 제3국을 선택, 브라질로 떠났던 김남수(61세ㆍ안드레아)씨는 조국을 떠난 대부분의 삶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조국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외로움과 소수민족의 굴레를 벗지 못했던 김남수씨.
그는 브라질에서의 두 차례 사망사건에 연루돼 자유를 찾아 떠난 40년 세월 중 27년간을 브라질과 상파울루 정신감호소에 수감되는 기이한 삶을 살아왔다.
강원도 고성군 통천면 포외진리가 고향인 김남수씨는 원산고급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1년 원산에서 국군에게 인민군으로 몰려 붙잡히게 되면서 김씨의 통한의 인생역정은 시작됐다.
군인도 아닌 학생 신분으로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17세의 김씨는 수용소 생활을 하는 동안 이념과 조국에 대한 모든 애착과 미련을 벗게된다.
김씨는 단지 수용소 안에서 사상전이 발생해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가는 참상을 목격하고 우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쪽도 북쪽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했던 것이다.
1954년, 동료 76명과 함께 인도로 갔다가 그 중 58명과 함께 다시 유엔의 주선으로 브라질에 최종 안착된 김씨는 그곳에서 성실하게 생활해왔으나 64년도에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 75년까지 12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일본인 회사에서 일을 했는데 임금을 주지 않자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싸움이 벌어져 일본인이 휘두르는 칼을 빼앗아 상대를 사망케 했다.
김씨는 이어 79년에 어느 중국인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식사비가 비싸다는 언쟁을 벌이다 중국인이 겨눈 총을 빼앗아 정당방위로 상대를 쏘았다가 두 번째 감옥생활을 시작, 브라질에서의 한평생을 거의 감옥에서 보내는 불운에 빠지게 됐다.
무엇보다 김씨는 이미 85년에 형 집행 정지를 받았지만 김씨를 돌봐줄 연고자나 후견인이 없었으므로 김씨를 이대로 둘 경우 죽을 때까지 감옥생활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김씨의 사연을 알고 있던「토요신문」(브라질판)에서 김씨를 석방하기 위한 구명운동을 시작했고 브라질 한인교회 김동억 신부 등 교포 사회가 주축이 돼「김남수 한국 영구귀국 추진위원회」를 결성, 석방과 동시에 한국으로의 귀국을 추진해왔다.
김남수씨 영구 귀국 추진은 국제 가톨릭교도사목회 회의에 참가했다가 브라질의 교정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방문한 서울 교도사목회 김우성 신부와 이백철 교수(경기대 교정학과)가 김남수씨 석방에 관심을 보이면서 급진전을 보게 됐다.
김우성 신부는 귀국 후 이 사실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고하고 김 추기경은 꽃동네 오웅진 신부에게 김남수씨를 받아줄 것을 요청, 오웅진 신부의 결단으로 김남수씨의 꽃동네 생활이 시작되게 됐다.
특히 김남수씨는 지난 40여년간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도 우리말을 잊지 않아 비교적 또렷한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으나 오랜 시간 갇혀 지낸 탓에 대인공포증이 심해 항상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브라질을 출발, 한국으로 귀국하는 중에도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냐"고 몇 번씩 확인할 정도였다고 김동억 신부는 전했다.
"한국은 땅이 너무 좁아 안 되겠다 싶어서 땅이 넓은 큰 미국이나 브라질 인도 등 큰 나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고 살아보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어요"
전쟁이 없고 서로 죽임도, 죽는 일도 없는 큰 나라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려 했다가 결국 초라한 육신만을 안고서 영구 귀국한 김남수씨는 아직도 성공에 대한 강한 열망에 불타 있는 듯했다.
유도 유단자임을 입증하는 메달을 허리춤에 차고 만나는 사람마다 꺼내 보이는가 하면 서양 장기를 두어 한 번도 져본 일이 없다고 자랑을 늘어놓을 정도로 순박한 그는 정신질환이 가끔 발병할 때를 제외하곤 매우 건강한 모습이다.
김포공항에 김남수씨가 도착하던 날 김씨의 귀국 소식을 듣고 남동생 김득수씨와 여동생 김순자씨 등이 찾아왔으나 김씨는 자신의 동생은 김이화뿐이라며 이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김씨의 가족들은 김씨가 꽃동네에 안착한 뒤에 다시 만나 기억력을 되살려보기로 하고 김포공항에서는 일단 헤어졌다.
공항에서 곧바로 서울교구청으로 김 추기경을 방문한 그는 "자신을 위해 힘써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에서 특별히 항공료를 부담해 이날 공항에 도착한 김남수씨는 또한 이번 귀국길에 비행기를 처음 타면서 한국도 이런 비행기를 갖고 있느냐며 묻기도 하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한국이 이처럼 발전한 나라인 줄 미처 몰랐다며 술회하기도 했다.
서울 교도사목회가 마련한 호텔에서 1박 한 뒤, 3월 10일 꽃동네에 도착한 김남수씨는 오웅진 신부와 꽃동네 가족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고 말년을 보낼 꽃동네가 마음에 드는 듯 연신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오웅진 신부는 "한평생을 감옥에만 갇혀 살아온 김씨의 건강이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인곡자애병원에 입원시켜 김씨의 정신상태와 건강을 정밀 진단할 계획"이라며 "꽃동네 온 가족과 함께 김씨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한편 오웅진 신부는 김남수씨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 외국인 신부로부터「안드레아」로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당시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다시 조건부 세례를 줄 생각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