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한국교회가 수많은 순교자들을 모시고 있다』며 자랑하고 있지만 그 순교자들이 어느 시기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어갔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고 있다. 천주교 우리는 이유하나만으로 능지처참, 참수, 교수, 생매장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통해 죽어가야만 했던 순교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깊이 숙고해야 할것이다.
따라서 본보는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1만명이 넘는 한국 순교성인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 그분들의 신앙적 열정을 생생히 체험하기 위해 순교자들이 겪었던 갖가지 행형(行刑) 들을 서술하고자 한다.
▨육시(戮屍) 능지처참
육시와 능지처참은 대역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과하던 것으로 머리, 양팔, 양다리, 몸뚱이 등 여섯부분으로 찢어죽이는 조선조 최대의 형벌이었다.
역모죄인으로 몰려 체포된 순교자들에게도 육시형은 예외가 아니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와 병인치명자일기 등에 의하면 유항검, 황심, 황사영, 김여광 등 네명이 육시형을 받았다. 이들 모두는 「외국의 침입으로 조선정부의 전복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육시되었다.
칼로 머리를 치면서 시작되는 육시형은 사지를 잘라내는 데에 도끼나 칼을 쓰지않고 팔다리를 소 네마리에 잡아매고 소들이 사방으로 달려가도록 채찍질을 하여 목잘린 이의 사지를 찢었다.
유항검, 황심, 황사영은 신유박해 (1801년) 때, 김여광은 병인박해 (1866년) 때 처형됐다.
신유박해때 특히 육시(능지처참) 형이 많았던 까닭은 노론벽파에 속했던 정순왕후가 대부분 남인 시파인 천주교인들을 척결하려는 정치적 이유와 황사영 백서, 주문모 신부 사건 등 일련의 크고 굴찍한 종교적 사건들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육시형을 받은 몸뚱이 여섯토막들은 각 도 (道) 에 보내여져 백성에게 겁을 주어 음모를 꾸밀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일부 야비한 포졸들은 보기흉한 살토막을 큰길로 끌고 다니면서 행인들의 돈을 뜯어내는 폐행이 자행되기도 했다.
중국에서 들어온 육시 및 능지처참형은 고려조 공민왕때부터 조선조 초기에 시행돼 오다 고종 31년(1894)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군문효수(軍門梟首)
대역죄인이나 국금 (禁)을 어긴 중죄인에게 행했던 조선조 사형방법으로 병영 (兵營) 이나 수영 (水泳) 이 있는 곳에서 군에 의해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집행과정은 먼저 군대가 형장에서 시위를 한 후, 사형수의 얼굴에 회칠을 하고 양팔을 등위로 잡아 묶고 어깨밑으로 긴 막대기를 끼워 여러 번 형장주위를 끌고 다니다가 큰 소리로 사형수의 죄상과 판결문을 낭독한 다음, 양쪽 귀에 화살촉을 위로 가게 꿰고 사형수의 웃옷을 벗긴 후 병졸들이 손에 칼을 들고 그 주위를 춤추며 돌다가 목을 벤다.
목이 잘려나가면 곧 머리를 거두어 작은 소반에 젓가락 두짝과 함께 올려놓아 군관에게 가져가서 사형수의 머리가 틀림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 시켰다. 젓가락은 사형집행관인 군관이 더 자세히 검사하고자 할 때 머리를 뒤적이기 위해 놓여진 것이다. 확인절차가 끝나면 머리는 몸뚱이 곁으로 다시가 높이 너댓자가 되는 기둥에 선고문을 쓴 판자밑에 머리칼로 매달아 놓는다.
조선초대교회때부터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입국한 성직자 12명 모두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주문모 신부가 처음으로 군문효수되었다.
세바퀴 조리돌림을 당한후 처형된 주문모 신부는 처형순간 갑자기 두꺼운 구름이 덮이고 형자위에 무서운 선풍이 일며 천둥, 번개와 함께 억수같이 퍼붓는 흙섞인 비가 내렸다 한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때 성행했던 군문효수의 형지로는 새남터, 경북, 문경, 경기도 강화, 충청, 갈매못, 부산 동래 등이 유명하다. 대부분의 형은 새남터에서 시행됐다.
새남터는 주문모 신부 (신유박해), 앵베르 범주교, 모방·샤스탕 신부 (기해박해), 김대건 신부, 현석문 (병오박해), 베르뇌 장 주교, 브르트니에르·도리·볼리외 신부 등이 군문효수된 순교성지이다.
또한 충청 갈매못은 다블뤼 안주교, 위앵·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황석두 성인 등이 순교한 유명한 곳이다.
▨참수(斬首)
조선시대 국사범에게 가했던 사형방법으로 여섯자되는 십자가에 사형수의 머리와 양팔을 묶어 감옥에서 형장까지 우마차로 호송한 뒤 사형수의 옷을 벗기고 꿇어앉혀 나무토막위에 머리를 받쳐 목을 자르는 형벌이다.
박해때 체포되어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대부분의 교우가 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는데 1백3위 한국순교 성인중 64위가 이 형을 받았다.
참수형은 조선교회 초기부터 거의 모든 박해때 실시된 보편형으로 서울 서소문 밖과 절두산, 해미, 연풍, 전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실시되었다.
서소문 밖 네거리는 44명의 한국순교 성인과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한국최대의 순교성지로 절두산과 함께 가장 많은 참수형이 가해진 곳이다.
서소문은 본래 남소문과 함께 서울 도성의 유해를 운반하던 곳으로서 순교자의 피로 물들이기 시작한 것은 신유박해(1801) 때부터 일이다.
정약종, 강완숙, 최창현 등 초기 평신도 지도자들의 순교지였던 서소문은 또한 기해박해 (1839) 때 정하상, 남명혁 김효주 등 41명의 순교성인과 병인박해때 남종삼, 전장운, 최형 등 3명의 성인이 참수된 곳이다.
조선교회 순교자중 가장 극적인 참수형을 받은 이는 정약종 (요한)이다. 정약종은 형리들에게 『당신들이 수치와 모욕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내게는 곧 영원한 영광』이라고 증언한 후 『땅을 내려다 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 것이 더 낫다』며 머리를 하늘로 향해 누이고 칼을 받았다.
참수형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신유박해와 병인박해때이며 참수형이 성행한 이유로는 천주교 신자가 극사범으로 몰린 까닭도 있지만 많은 수의 교우들을 가장 손쉽고 빠르게 처형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사(杖死)
조선정부는 대명률 (大明律) 에 근거한 형법이 있어 죄의 경중에 따라 죄수들을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5형(五形)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조정 및 일반 관청은 천주교 신자들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이를 무시했다.
모반죄, 내란죄, 유언비어 유포죄, 사교유포죄, 불효죄 등 갖가지 죄명을 씌워 혹독히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해온 조정은 또한 법으로 정한 형구 (形具) 외의 도구를 사용, 가혹한 고문을 신자들에게 서슴없이 자행했다.
이러한 행형의 문란은 1801년 신유박해때 가장 심하게 드러났다. 남자에게도 사용이 엄금 되어 있던 주리형이 신유박해때 부터 여교우들에게 사용되어졌고 이순이 누갈다는 발가락이 부숴지는 고문을 받았다.
금지된 행형이 자행된 예를 들면 먼저 죄인을 땅바닥에 엎어놓고 힘센 장정이 단단한 참나무 곤장을 들고 수형자의 다리오금 밑을 힘껏 치는 치도곤 (治盜棍) 이 있다. 이 치도곤을 몇대만 맞아도 피가 솟아오르고 살점이 터지며 열두어대 때리면 뼈가 드러난다. 순교자들이 이 치도곤형을 한차례 신문에서 60대까지 맞았다.
다음은 판봉 (板棒), 태(笞), 장 (杖) 형으로 판봉은 길이석자, 너비 두치로 수형자 정강이를 치는데 사용되었고 태는 팔다리를, 장은 허리와 넙적다리를 치는데 사용됐다.
이밖에도 수형자의 옷을 벗기고 두손을 등뒤로 잡아묶어 공중에 매단 학춤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는 단근질, 주뢰질, 줄톱질, 삼모장 등 잔혹한 형벌들이 무차별하게 교우들에게 자행됐다.
장형이 가장 심하게 이루어졌던 곳은 포청 옥과 충청도 청주 옥이었으며 김사범, 심아기, 심봉학 등 수많은 이가 고문으로 숨졌다.
▨생매장
1866년 병인박해때 충남 해미에서 유일하게 이루워졌던 처형방법으로 성밖 개울가에 깊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살아있는 천주교 신자 무리들을 포개넣고 그 위에 흙과 돌 따위를 쌓아 생매장했다.
생매장은 한꺼번에 많은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으로 한번에 20~25명을 대들보로 머리를 으스러 뜨리는 대들보 처형법과 함께 널리 사용되었다.
방마리아, 박요한, 문마리아 등 2천명이 넘는 교우들이 이곳 충남 해미에서 생매장이나 대들보형을 통해 순교했다.
▨교수(絞首)
조선조때 널리 사용되던 사행집행 방법중 하나로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교수대에 올려져 집행된 것이 아니라 주로 옥안에서 목졸라 죽이는 교수형이 많았다.
교수형은 신유, 기해, 병오, 병인 등 전 박해기간동안 참수형과 더불어 가장 널리 사용된 처형방법으로 병인박해때 충남 공주와 해미에서 극히 심했다. 병인박해 증언록 등 공식문헌을 통해 알려진 병인년 교수형 순교자만해도 8백여명이 넘으며 한국 순교 성인중 14명이 교수로 순교했다.
교수형은 대개 심한 고문과 함께 옥에서 조정의 승인없이 공공연히 자행되었는데 성 유대철 (베드로) 은 13세의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총 14회의 고문과 1백여대의 매와 40여대의 치도곤을 맞은 후 포청옥에서 교수되었다.
교수형 방법은 극히 다양해 수인이 잠든 사이에 몰래와 목을 매어 죽이는가 하면 맷돌구멍에 머리를 처박게 한후 줄을 당겨 죽이기도 했다.
또한 많은 수의 처형을 위해 여러명의 목을 맨줄을 소가 잡아 당기게 해 교수하는 예도 있었다.
▨백지사
백지사는 죄인의 얼굴에 젖은 한지 (韓紙)를 붙여 질식사 시키는 잔인한 사형방법으로 병인박해때 서울을 비롯한 수원, 경기도 광주 등지에서 시행됐다.
치명일기에 보면 한때 배교했다가 회개하여 고마수영에서 순교한 다블뤼주교외 4명의 순교자 유해를 안장하다 잡힌 이 바오로와 두 아들, 김성집, 박종문과 그의 아내, 최인경, 정규량 신부의 당숙이며 증조부인 정베드로와 정바오로가 백지사로 순교했다.
1872년 전남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성운과 유작객, 유치경은 형리들로 부터 불로 발등을 지지는 고문과 태장을 무수히 맞은후 착고와 목로시로 옥에 감금돼 있다 얼굴에 백지를 붙인후 물이 뿜어져 질식사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