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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우 신임 제주교구 부교구장 주교] 삶과 신앙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7-07-04 수정일 2021-02-16 발행일 2017-07-09 제 3052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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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신자, 포콜라레 통해 사제의 길로
어려운 친구에게 옷도 주고 차표도 주곤 했던 착한 학생
고 2때 입교… 늘 신앙 부족하다며 스스로 낮추는 삶 살아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 지켜준 사제들 보면서 ‘성소’ 키워

아무도 몰랐다. 그가 세례를 받을지, 더구나 신학교에 가게 될지, 사제가 될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고 신학생이 돼 사제서품을 받을 때 누구도 의아해하거나 갸웃하는 사람이 없었다. 6월 28일 제주교구 부교구장 주교(Coadjutor Bishop of Cheju)로 임명된 문창우(비오·54) 주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엄청난 일 앞에…, 전율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문 주교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비쳤다. 그만큼 문 주교 자신에게도 놀라운 부르심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그를 자비로이 부르고 계셨다.

■ ‘착한’ 아들·형제·친구…

문창우 주교는 아버지 문종수(요셉·86·제주 동광본당)-어머니 김양희(아가다·83)씨 사이에서 1963년 부산 감만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친척을 따라 부산으로 건너간 부친은 시내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며 65세로 은퇴할 때까지 사람 실어 나르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다. 문 주교가 3살 때이던 1966년 일가가 부친 고향인 제주도로 옮겨오면서 그에게도 제주도가 실질적인 고향이 됐다.

위로 큰누이를 비롯해 아래로 여동생 셋과 두 남동생을 둔 문 주교에게는 늘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선후배·동료 사제들 사이에서도 ‘착한’ 신부로 통하는 문 주교의 삶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께서 안배하신 것인지 모른다.

어려운 시절 7남매를 키운 부모에게 문 주교는 한 번도 애 먹인 적 없는 착한 아들이었다. 장남인 문 주교 덕분에 형제들 사이에 조그만 다툼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여동생 문영순(베로니카·49·제주 동광본당)씨가 기억하는 오빠 문 주교는 화낼 줄 모르는 자상한 형제였다.

‘착한’ 형제 문 주교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은 동무였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 집안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닌데 친구를 만나고 들어온 소년 문창우의 옷은 사라지기 일쑤였다. 헐벗은 친구에게 자기 옷을 벗어주고 들어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하루는 누나 문정인(카타리나·57·제주 동광본당)씨가 동생이 너무 늦게 집에 들어와 이유를 물어보니 “한 장 있는 차표를 표가 없는 친구에게 주고 걸어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 늦깎이 신자, 낮추는 삶 몸에 배

문 주교는, 착한 목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시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소년 문창우는 늦깎이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한창 공부에 재미를 들여가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을 다니던 그에게 주님의 손길이 미쳤다.

누가 권한 일도 없는데 집에서 가까운 동문성당을 오가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예비신자가 된 세 살 터울의 누나 정인씨가 동생 창우를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성당에 다니게 되면서 처음 펴든 성경, 한동안 소년 창우의 눈길을 붙든 대목이 있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지내온 화두가 그냥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찰나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치는 감동의 체험은 지금도 가슴 한켠에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불씨를 지피고 있다.

■ 착한 목자의 길로 부르시다

신앙을 접하고 부쩍부쩍 성장하던 새내기 신자 문창우는 1981년 집에서 멀지 않은 제주대학교에 입학해 화학을 공부하게 된다. 대학은 문 주교의 삶에 분수령이 된다. 전공 공부보다는 세상에 먼저 눈을 뜨게 만든 곳도 대학이다.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며 1학년이 끝나가던 1982년 1월, 청년 문창우에게 일생일대의 전기가 찾아온다. 훗날 문 주교는 그 때의 체험을 주님의 손길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시 제주교구 사목국장이던 김창훈 신부 권유로 포콜라레 피정을 처음 접하게 된 것. 신앙에 발을 들여놓은 후 모든 게 ‘처음’이었던 그에게 포콜라레 영성이 남긴 인상은 강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복음 묵상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던 그에게 말씀을 생활화하고 살아간다는 가르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말씀을 산다’는 것에 대한 강한 충동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후로도 포콜라레 모임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사제가 된 후 포콜라레 제주공동체를 이끌며 제주에서 처음으로 여름 마리아폴리를 열게 된 데에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런 그가 세상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가톨릭학생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시절 1987년 6월 민주항쟁 소용돌이 한가운데 그가 서있었다. 학생운동을 이끌던 그는 제주 중앙로에서 데모를 하다 쫓겨 제주중앙주교좌성당으로 들어간다. 불안에 떨며 성당에서 일주일간 농성을 하던 당시 그를 비롯한 학생들을 지켜준 신부들을 보면서 사제의 길을 향한 마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8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의 발걸음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포콜라레의 도시 이탈리아 로피아노를 향한다. 돌이켜 보면 그곳에서의 1년 반에 걸친 포콜라레 영성학교 기간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체험이었다. 이듬해 10월 귀국한 청년 문창우는 사제의 길을 향한 강렬한 열망에 덥석 신학교에 지원한다. 입학시험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자신을 비롯해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를 부르셨다. 1990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1996년 사제품을 받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제주 4·3사건을 비롯해 제주도민의 한과 정서를 처음 신학적으로 조명했다. 2007년에는 제주대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를 받고 2014년 서강대에서 종교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 한없이 낮은 자세로, 세상을 향한 눈길

스스로 “신앙의 뿌리가 깊지 않다”고 고백하는 문 주교는 그만큼 낮은 자세로 살아온 사제로 알려져 있다.

신학교 교수 시절 10년 동안 하루 다섯 번 기도를 신학생과 모두 함께했다는 그의 고백이 사제로서의 자세와 노력을 잘 보여준다. 제주교구 교육국장 등을 거쳐 신성여중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지금도 신학교 교수시절부터 애용하던 낡은 승합차를 손수 몰고 다닌다. 20년이 다 된 차도 후배사제가 타다 문 주교의 간곡한(?) 부탁에 넘긴 것이다. 너무 낡아 문 주교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시동도 걸리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문창우 주교의 어린 시절. 문 주교(맨 왼쪽)와 막내 동생 문창건 신부(흰 모자 쓴 어린이).

1995년 2월 부제서품을 받고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문 주교.

1996년 사제수품 뒤 신자들에게 첫 강복을 하고 있다.

2015년 1월, 문창건 신부(맨 오른쪽) 첫 미사 봉헌 후 문 주교, 부친 문종수씨와 모친 김양희씨(왼쪽부터)가 기념촬영하고 있다. 문창건 신부 제공

교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고 있는 문 주교. 신성여중 제공

2013년 12월 8일 열린 제주 4·3 심포지엄에서 ‘신학적 주제로서의 제주 4·3’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는 문 주교(오른쪽에서 세 번째).

문 주교(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신부로 재임하던 시절 제주교구 신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광주가톨릭대학교 제공

문 주교의 차.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