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21)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상)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입력일 2016-05-25 09:16:19 수정일 2016-05-27 14:14:18 발행일 2016-05-29 제 2996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예술과 윤리·구원에 대해
쉼 없이 고민한 영화감독
예술가로서 탁월함
사상가로서 투철함
인간의 진실성 표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아마 꽤 많은 분들이 한 어린아이가 바닷가 고목 옆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 ‘희생’의 포스터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1994년 이 영화가 서울의 한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당시로서는 놀랄 만큼 많은 관객들이 전혀 상업적이지 않은 이 영화를 보러와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었죠. 이 영화의 성공은 당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유행처럼 번진 영화공부와 예술영화 보기의 정점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운’ 예술영화를 애쓰며 이해하려는 분위기는 몇 년이 지난 후 소리 없이 사라져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영화가 나오고 10년쯤 지나 지각 개봉했던 ‘희생’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입니다. 지금도 이 감독의 이름을 가끔씩 만나게 되지만, 그의 영화를 애써 보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그의 비타협적인 예술성과 윤리성은 이제는 경외심과 존경심의 대상만이 아니라, 이해 못할 지루함과 난해함, 시대착오로 받아들여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지닌 가치는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질문들의 진지함과 깊이, 그 자신이 한편의 영화를 창작하고 제작하는 동안 들인 헌신들과 함께 바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술과 윤리와 구원에 대해 평생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가운데 점점 초월을 향한 갈망과 예감이 두드러졌던 그의 영화 세계를 우리는 과장 없이 ‘인간존재의 영적 탐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모색은 비록 그의 영화를 잘 모른다 하더라도 참된 영성을 찾고 살아보자고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귀 기울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세 번에 걸쳐 그의 영화와 글에서 길어낼 수 있는 영성적 메시지를 음미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봉인된 시간」 속에서 만나는 윤리, 예술 그리고 삶

1932년 4월 4일 러시아 북동부의 자브라체에서 유명한 시인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86년 12월 29일 망명 중 아까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반의 어린시절(1962)’,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안내인(스토커)(1979)’, ‘향수(1983)’, ‘희생(1986)’이라는 단 일곱 편의 작품만을 남겼지만 그 모두가 그의 예술가로서의 탁월함, 사상가로서의 투철함,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성을 잘 반영하며 각고의 노력과 절실함으로 인간의 영적인 차원을 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영화만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자신의 예술적이고 영적인 투쟁과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하기 얼마 전 출간되었던 일종의 영화론 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봉인된 시간」에서 그의 예술과 윤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1)

그는 영화가 시학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이는 영화예술이 진실된 삶의 윤리를 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시란 문학의 한 장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시란 내겐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시란 인간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 이런 예술가야말로 존재의 정서적 구조의 특별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선적인 논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며, 섬세한 모습의 특수한 본질과 삶의 비밀스런 현상, 삶의 복합성과 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낼 수 있다.(26, 27쪽)”

한편, 그의 예술관을 보면 낭만주의와 독일 관념론을 통해 완성된 이상주의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관점을 그저 하나의 사상으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체험하고 살아온 진실된 경험과 부합하기에 각고의 숙고와 결단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세계관과 윤리적 그리고 이념적 목표인 것이다. 훌륭한 걸작 예술품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한다. 윤리적 이상은 예술가의 상상력과 느낌을 좌우한다. 예술가가 삶에 애정을 가진다면 그는 이 삶을 인식하고,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시키는 일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절대적 필요성 또한 감지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만일 한 예술가가 삶을 더욱 보람차게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면 현실이 묘사되는 과정에서 그 예술가의 주관적인 표상과 그의 영적인 상태를 통해 현실이 여과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인간 완성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정신적 노고의 결과인 것이며, 사물에 대한 느낌과 생각의 조화로, 그 품위로 그리고 그 단순간결성으로 우리들을 사로잡는 세계관의 표현인 것이다.(33쪽)”

그의 영화론은 무엇보다도 예술가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인식과 문제의식에서 자라난 ‘책임의 윤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예술은 소비사회의 상품처럼 자기 자신을 대해서는 안되며 삶과 인간 존재를 해명하는 노력, 삶의 근본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을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는 예술은 ‘절대진리’의 인식을 위한 추구이자 실천이어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합니다.

“예술과 학문이란 그러니까 인간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형식인 것이며, 소위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는 인간의 인식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인간적인 것, 잔인한 것, 무한한 것, 제한된 것, 이 모든 것들을 예술가는 독특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것을 포착하는 한 형상의 창조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다.(46쪽)”

그는 근대 이후 예술의 상업화와 자기 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며 다음과 같이 우리 시대에 잊혀진 진정한 예술가의 전형을 떠올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현대 예술가의 오만불손함을 한 번쯤 샤르트르(Chartres) 대성당을 지은 이름 없는 건축가의 겸손함과 비교해야만 할 것이다! 예술가는 사심없는 임무 수행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을 우리 모두는 오래전에 이미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240쪽)”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