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위중 23명 순교한 곳 우포도청 모습만 남아있어
1백3년 동안 이어진 피의 대박해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혹은 이름 없이 죽어간 무수한 순교자들, 그날의 뜨거운 피 흘림으로 오늘의 한국교회는 뿌리를 내렸다. 그 가운데 이제 곧 성인으로 공경 받게 될 1백3위 순교복자들이 신앙의 피를 뿌린 전국의 순교터는 신앙의 고향으로서 그 개발과 보존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열기 속에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1백3명의 순교복자 가운데 23명의 복자가 모진 고문 속에 죽어갔고 대부분의 순교자들이 온갖 형벌의 고통을 치뤄냈던 서울의「좌ㆍ우포도청」과「의금부」, 그리고「전옥」을 기억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獄死」또는「絞首」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순교자들의 고행의 터전은 현재「우포도청」만 그 모습이 남아있을 뿐 이제는 그 어느 곳에서도 기세당당했던 믿음의 흔적, 신앙의 숨결을 찾아볼 길 없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있다. 「우포도청」, 지방유형문화재 제37호.
1백3년간 끊임없이 이어진 대박해속에서 뼈가 부서지고 살이 으스러지는 박해의 현장이었으며 결국 생사가 판가름 났던 좌ㆍ우포도청과 의금부 등 잔혹한 역사의 현장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습이 바로 우포도청이다.
그러나 1백3명의 순교복자 가운데 서소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23명의 복자를 배출(?)해 냈던 영광의 터전들은 현재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잊혀진 현장이 되고 말았다. 현재 각종 문헌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서슬이 퍼렇던 좌포도청은 단성사자리, 우포도청은 동아일보사와 광화문 우체국자리로 밝히고 있고 의금부는 지금 그 모습이 헐리고 제일은행본점이 들어서고 있는 옛 신신백화점과 그 뒤편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 성북구 삼성공원 깊숙이 옛 모습 그대로 서있는「우포도청」은 건물자체를 이전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도둑이나 강도 살인범 등을 취조하고 벌주던 포도청이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과 악형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조 순조때 전개된 기해박해부터. 가장 굴욕적인 망신과 멸시의 방법으로 신자들을 무조건 잡아들였던 좌ㆍ우포도청과 의금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고문과 악랄한 형벌로 1백여 년간 무수한 신자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갔던 영광의 순교지라 말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사(달레저)에 기록되어있는「옥사」「옥중치명」「치사」또는「교수」등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벌어진 극도의 고문과 악형으로 순교의 대열에 나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서소문다음으로 많은 복자를 탄생시켰던 이곳은 이제 1백3위 시성확정으로 그 어느 순교지 못지않는 영광의 터전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옥중에서 순교한 23명의 순교복자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이들 중 최경환(암브로시오)을 빼놓을 수는 결코 없다. 그는 바로 이 땅의 두 번째 사제로 12년 동안 죽음과도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했던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였으며 좌포도청에서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한 대표적인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15살의 어린나이로 기꺼이 순교의 화관을 받았던 유대철, 그리고 이바르바라 등 23명의 순교자들은 칼을 받아 순교하기를 원했던 현실과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악형으로 끝내 옥중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던 용맹한 순교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성인으로 온 세상의 공경을 한 몸에 받게 될 이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버렸던 순교의 터전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그냥 잊혀지고만있다. 땅을 확보할 수 없다면 팻말이라도 세워 자랑스러운 순교성지임을 기억케 해야 한다는 뜻있는 이들의 조그만 염원은 아직도「소망」으로만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