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전북 장계에「백 주교 피난굴」

입력일 2011-05-17 15:50:27 수정일 2025-07-01 14:37:53 발행일 1983-04-10 제 1350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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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날랐다”- 대 이어 구전 
큰 골엔 백 주교 배나무도 있어 
1878~81년 은거 추정…지금도 추모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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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주교가 박해를 피해 은신했던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리 큰골 뒷산 상여덤의 피난굴.

학교ㆍ고아원ㆍ양로원 등을 설립, 한국 가톨릭과 사회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제 7대 조선 교구장 블랑 白 주교가 주교성성 이전 박해의 회오리를 피해 은거했던 속칭「백 주교 피난굴」 (전복 장수군 계북면 월현리)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몸과 마음을 다 비친 벽안의 외국인 주교의 지고한 뜻을 추모하기 위한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전라도 북도 전주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진안 곰치재를 돌아 두어 시간 남짓 달라면 장계 성당이 위치한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에 도착하게 된다.

장계리에서 다시 무주 쪽으로 택시 한대가 겨우 드나들 만한 비 포장길을 20여리 밟으면 장계 본당 관할 매계 공소가 나오고 이곳 매계 공소에서 장고개(정지터끝) 월전(달앗골) 뙤양양지(월현 공소)를 지나 서쪽 골짜기로 8백m 가량 오르면 백 주교가 피산하여 묵었던 큰 골로 접어들게 된다.

이곳 큰골에서 경사 50도의 가파른 산을 약1시간 가량 걸어 오르면 상여같이 생겼다하여 상여덤이라고 불리 우는 해발 6백m의 산중턱에 백 주교가 피신했다는 피난굴, 큰 굴과 작은 굴이 나온다.

석회암으로 되어 있는 길이 10여m 높이 3m 가량의 이 큰 굴은 왼쪽의 좁은 복도를 지나면 4m의 방과 샘물, 백 주교가 앉았다는 장방형의 돌이 있다.

또한 굴 입구는 밖에서 보이지 않게 돌로 담을 쌓아 굴 입구의 왼쪽으로 사람 1명 정도가 겨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데 그곳도 위험하면 산모퉁이를 돌아 오봉리 옥자 동굴 우거진 숲속으로 피했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6ㆍ25동란 때 북괴군 패잔병들이 이곳에 숨어서 밤이면 동리에 내려와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당시 전투 대원들이 돌로 굴을 메우고 입구를 막아 현재는 원형이 사라지고 바닥이 높아져 구부려서 겨우 다닐 수 있게 돼 버렸다.

백 주교가 이곳에서 피신한 기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천주교 호남 발전사」와「신앙 자유의 여명기」그리고 김진소 신부가 기고한「교회와 역사」40號에 의하면 대개1878년 늦가을에서 1880년 사이에 백 주교가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78년 공소 순회차 장수 지방에 들른 백 주교는 지리적으로 첩첩산중에다 공소도 많아 처음 장고개에서 수개월 거처하면서 성사를 집행하다가 정세가 험악해지자 안전한 큰골로 옮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황해도 구월산「홍끝」에 피산, 사목하다가 1878년 여름 고산 배티를 거쳐 1880년 장수로 이동한 두세 丁 신부가 白 주교와 합류, 함께 큰골과 피난 굴에서 은신하다가 1881년 이곳을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 주교와 정 신부는 큰 골 부락에서도 신변이 위험함을 느끼고 큰골 바로 뒷산인 상여덤 큰 굴과 작은 굴에서 수개 월간 피신, 당시 신자들은 밤이면 포졸들의 눈을 피해가 가파른 산길을 헤치고 주먹밥을 날랐고, 또 연기가 잘 나지 않는 싸리나무로 두 성직자가 밥을 해먹기도 했다는 자손들의 구전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6ㆍ25이전까지 이곳 피난굴 일대에는 숲이 깊어 지척을 분간하기 힘들어 지리에 익숙한 신자들마저 어려움을 겪은 반면 피난 굴에서는 산밑동리의 동정까지 샅샅이 살필 수 있어 은거지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현재 백 주교의 은거 사실을 증명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고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오래전에 사망해 버려 대개 3~4대를 거친 자손들의 증언뿐이며 교적마저 6ㆍ25때 불타 버린 형편이다.

그러나 상여덤의 백 주교 피난굴에 대한 일대 4개 부락 주민들의 대를 내려오는 뚜렷한 인식과 특히 백 주교가 기념으로 심었다는 큰골 아름드리「백주교 배나무」는 아직도 실과를 맺고 있으며 월현에는 백 주교가 축성했다는 샘물이 맑게 솟아나고 있다.

「어릴 때 본당 신부님께서 춘추 판공때마다 들리시면 할아버지께서 항상 신부님께 함께 피난 굴까지 오르며 백 주교님의 전설을 전해 드리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고 전하는 장계본당 최학부씨와 현 월현 공소 김학수 회장은「81년 본당 청년 회원들이 팀을 조직, 백 주교의 흔적이라도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