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부처님이 앉아 참선을 하고 계셨다. 그때 비둘기가 한 마이 날아와 부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부처님이 까닭을 묻자, 굶주린 여우가 자기를 잡아먹기 위해 쫓아오고 있다고 했다.
이를 가엾이 여긴 부처님은 비둘기를 가슴에 품어 숨겨주었다.
곧이어 여우가 달려와 부처님께 비둘기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비둘기는 왜 찾느냐고 묻자 여우는 며칠 때 주린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비둘기를 먹어야 겠다고 했다.
그래도 남의 생명을 해쳐서야 되겠느냐고 타이르자, 여우 하는 말이 『부처님은 비둘기가 죽는 것은 가엾고, 내가 굶어 죽는 것은 가엾지 않느냐』고 대들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싶은 부처님은 여우에게 비둘기 살만큼 자신의 살을 베어주기로 했다.
여우는 비둘기의 살보다 조금도 모자라선 안된다며 저울을 가져왔다.
저울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난 뒤에 부처님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한 편에 올려 놓으셨다.
그러나 저울 눈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른 쪽 허벅지 살을 베어 더 얹어놓았다.
그래도 저울 눈금은 변화가 없었다. 다시 팔을 베어 얹고 다리를 베어 얹었지만 저울 눈금은 같아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부터님 자신이 저울대로 올라가자, 이번에야 저울 눈금이 비둘기와 똑같아졌다.
이 우와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제아무리 하잘 것 없는 미물이라 해도 생명 자체에 있어서는 위대한 성자의 목숨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하다는 것이 불교적인 생명관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 모든 생명은 평등하니까.
생명의 측에서 보면 생명 존재 하나 하나가 다 고유한 존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생명의 가치에서는 인간이나 자연이 존재론적으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다면 단지 인간이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데에 그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자연의 자기조정력마저 혼란시켜버렸다. 그런 우리가 무슨 염치로 이성을 내세워 생명의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