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하느님을 묵상하다(Memento Deum). 문득, 그렇게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
올해 들어 교회 안팎으로 알만한 분들의 선종 소식이 이어졌다. 김수환 추기경, 최영수 대주교, 최석우 몬시뇰의 선종에 이어 김대중·노무현 전직 대통령의 죽음도 있었다. 늦더위가 기승이던 지난 8월, 불의의 사고로 둘째 아들을 잃은 친구의 아픔도 목도했다. 문득, 죽음이 가깝게 느껴진건 이런 부음(訃音)들 영향일게다.
가톨릭에선 죽음을 ‘선종’(善終)이라 부른다. ‘선생복종정로’(善生福終正路)의 준말인 선종(mors bona, mors sancta)은 “일상에서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살다가 복되고 거룩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가톨릭대사전은 풀이했다. 따라서 선종은 ‘착한 죽음’ 혹은 ‘거룩한 죽음’ 정도로 이해된다.
선생복종(善生福終)은 사실 모든 살아있는 이들의 소망이자 염원이다. 죽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역설적이다. 가톨릭교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요 영원에 드는 관문이라고 가르친다. 죽음은 그래서 참으로 복된 순간이요, 간절히 희망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는 ‘그러한 죽음을 가능케한 이승의 삶은 또 얼마나 고귀한가’ 라고 설파했다. 이 또한 역설이다.
전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의 유고집(그대로 이루어지소서)에 정 주교가 평소 가깝게 알고 지내던 노 부부의 일화가 나온다. 매일같이 불우시설과 이웃을 찾아다니며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았던 아내는 어느해 봄, 주님의 만찬미사에 참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승용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광안대교 위로 뜬 둥근 달을 보라는 남편의 말에 “어제가 보름날, 내 생일이었으니까”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늘 하던대로 뒷 좌석에 기대어 쉬는듯 그렇게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우린 종종 선종이라 하면 소박하고 담백한 임종을 떠올린다.
얼마전 한 일간지 귀퉁이에 소개된 영국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사연도 가슴을 울린다. 할머니의 죽음 후 그녀의 유산 가운데 일부는 생전에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버스운전기사들에게 전달됐다. 그들은 앞을 못보는 그녀를 위해 기다려주고 손을 잡아주었다. 작은 친절과 배려가 큰 갚음으로 되돌아왔다.
죽음 앞에서 ‘무욕’(無慾)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죽음 묵상은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참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려내고 선택할 수 있는 혜안을 열어준다. 또 무엇을 믿고, 바랄 것인가에 답을 준다.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거룩한 전통(聖傳) 안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영원한 생명을 만난다. 신앙의 원천은 우리에게 ‘한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주문한다. 들은 대로,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살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삶을 따를 용기와 지혜를 우리는 그곳에서 얻는다.
신앙은 구호나 장식이 아니다. 내가 필요할 때 부르는 긴급호출도 아니다. 신앙은 삶이요, 실천이다. 신앙은 곧 사랑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은 성경과 성전 안에 있다.
마더 데레사, 헨리 나웬, 막시밀리안 꼴베, 에디트슈타인…. 교회가 공경하는 현대의 성자(聖者)들은 모두 그러한 삶을 발견하고 그 삶에 투신한 이들이다. 그래서 복된 삶과 죽음을 맞은 이들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가치있고 소중한 것은…? 죽음을 기억하며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