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가브리엘, 서울 고덕동본당). 올해 나이 스물넷. 지난해 2월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 2년생이었다. 본당에서는 전례부원으로 활동해온 열심한 신앙인이었고,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좋은 친구로 살아온 듬직한 청년이었다.
철없던 시절 공부를 게을리 한 것이 못내 후회되기라도 하듯 복학하고 나서는 학교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장학생에 선발된 기쁨도 잠시, 비슷한 성적의 동료가 부모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라 등록금 마련이 어렵다는 지도교수의 말에 기꺼이 양보했다. 사실 김도형씨 네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라 한푼이 아쉬웠음에도….
이번 학기에는 월등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겠다는 각오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6월 11일 밤 9시30분경, 기말고사 준비에 진이 다 빠진 김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도서관을 나섰다. 막 교문을 나서는 순간 술 취한 오토바이가 뒤에서 덮쳤고….
수술 후 뇌사판정, 살아나기 힘들다는 진단이 나왔고 병원에서는 장기기증을 권유해왔다. 자식을 잃은 것 만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인데 장기 마저 떼내자니 야속한 마음이 앞섰다. 『내 팔 다리는 떼어 줄 수 있어도 어찌 자식의…』하는 심정이었지만 가까운 친척이 신장을 이식 받아 건강하게 살고 있고, 평소에도 장기기증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용단을 내렸다.
6월 14일 밤 이식 수술에 들어갔다. 안구, 각막, 심장, 신장, 간 등 기증할 수 있는 장기는 모두 떼어냈다. 24살 건강한 청년의 장기는 7명의 환자에게 이식돼 새 생명과 새 빛을 주었다. 6월 16일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화장된 김씨의 유해는 학교 뒷산에 뿌려져 영원한 학생으로 살아가게 됐다.
『심성이 너무 착했지요.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할머니를 보면 꼭 들어드려야 했고, 남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요』 『나(엄마)랑 같이 산책을 자주 했어요. 돌아 올 때는 나를 꼭 5층까지 업어주곤 했지요』무엇보다 장례를 치르면서 생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위로 그리고 도움을 받으면서 「내 아들이 헛되게 살지는 않았구나」하는 큰 위안을 얻었다.
김씨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들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다. 지금도 현관문을 열고 『엄마』하며 들어설 것만 같다. 짧은 생애였지만 많은 사람에게 생명과 빛을 나누어준 아들. 그 죽음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