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사에서 천진암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험해서 사람의 왕래가 드문 산길이었다. 횃불을 든 행자가 앞에서 길을 내면 몽둥이를 든 이벽과 천복이 그 뒤를 따랐다. 앵자봉은 항금리고개보다 높고 가팔랐다. 멀리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씩 포효할 때마다 산이 흔들렸다… 눈 내린 밤에 앵자봉을 넘어온 이벽의 등장으로 강학당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너나 할 것 없이 얼음장 같은 이벽의 손을 맞잡고 격하게 흔들었다.”(황보윤 소설 「광암 이벽」중에서)

이벽(요한 세례자)을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에 설렘으로 책을 구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역’의 한 사람이며 신앙의 증거자로 최후를 맞은 분이 아닌가. ‘하느님의 종’ 이벽 성조의 삶과 믿음에 끌려, 황보윤 작가의 필치에 쏠려 단숨에 독파했다. 빛과 진리를 찾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오갔던 머나먼 험한 길…. 이벽에게 천주학을 넘어 천주교 신앙은, 무엇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 길 위를 걸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필자가 목격했던 한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올해 초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어느 부자였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주간보호센터 버스를 기다리는 연로한 아버지와 그를 배웅하는 중년의 아들. 아버지와 아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하! 이게 바로 생로병사 세대 교체구나.’ 싶었다. 생물학적 나이는 피할 수 없지만, 노화와 신병을 늦추는 답은 걷기라는 신념이 더 커졌다.

‘누죽걸산’이란 말이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의 줄임말이다. 필자도 한때 마라톤에 푹 빠져 지냈다. 10㎞, 하프 마라톤과 풀코스 마라톤은 물론 100㎞ 울트라 마라톤까지 즐겼다. 힘든 운동이었지만 뜀박질 자체가 좋았다. 마라톤은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감을 키워 주는 든든한 친구였다. 그런데 장거리를 장시간 달리다 보면 지치게 마련이다. 걷고 싶고, 서고 싶고, 앉고 싶고, 눕고 싶고…. 일단 이런 유혹에 빠지면 다시 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먹고 천천히라도 달려야 피니시 라인을 밟을 수 있다. 러닝도 걷기와 닮은꼴이라서 하는 얘기다.

걷기 가운데서도 요즘 맨발걷기 바람이 뜨겁다. 유튜브에는 ‘기적의 치유법’이란 제목이 달린 영상들이 넘쳐난다. 실제로 산과 들에는 맨발족을 위해 조성된 흙길, 황톳길을 만날 수 있다. 지자체들이 앞다퉈 나섰고 세족장 같은 편의시설까지 만들어 놨다. 맨발걷기에 입문한 지 어느새 넉 달째. 산길, 둑방길 등 접지(어싱·earthing)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간다. 맨발로 걸으면 뇌 감각 활성화, 면역력 증강, 노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한다.

걷기를 얘기할 때 우리 시대의 뛰어난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가 떠오른다. 그는 뜻밖에도 등산 애호가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 위의 순례라는 그의 ‘걷기의 신학’은 인상적이다.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뒤를 끊임없이 따르며,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의 길을 간다. 모든 길은 십자가 길의 일부이고, 죽음을 넘어서 부활에 이르는 길의 일부이다.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있다. 그분은 길이다.”(안셀름 그륀 「길 위에서」 중)

때마침 포천시 화현면 이벽 성조의 생가터에 기념성당이 봉헌되고 성지가 조성됐다. 가톨릭언론인산악회는 내달 그곳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산정호수 둘레길을 걷고 나서 성지에서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신앙 선조의 얼을 되새기려 한다. 그러고 보면 성지순례와 걷기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영성과 건강을 동시에 다지기 위해서라도 꼭 떠나 보자. 특히 9월 순교자 성월이 다 가기 전에 가까운 어느 성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