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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근 해금된 남북작가 「정지용」의 맏아들 정구관씨

금종건 기자
입력일 2019-07-29 15:05:46 수정일 2019-07-29 15:05:46 발행일 1988-04-10 제 1600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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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독실한 신앙인”

교회언론에 종사… 성당도 건립
“신앙시비 하나쯤 세웠으면…”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아버님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분의 문학작품들을 독자들에게 되돌려 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4월1일 정부로부터 부친 정치용의 해금소식에 접한 정구관씨(61ㆍ베네딕또)는 지난 40여년간 월북 작가의 맏아들로써 겪어야 했던 수많은 고통들을 회고하며『이번 조치를 시발로 백석ㆍ이태준 등 나머지 20여명의 남북작가들도 하루빨리 해금돼야 한다』며『남북작가들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문인ㆍ학자ㆍ독자들의 광범위한 토론을 거쳐 민족문학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씨는『아버님의 경우 공산주의와는 화합할 수 없는 모더니스트시인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남북직후 충분히 입증됐다』고 밝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0여년간을 관제 공산주의자로 묶어 작품을 감금시킨 것은『6ㆍ25를 전후한 정치인들의 무지와 편견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정시인이 월북한 것이 아니라 납북됐다는 사실은 어떻게 확인했는가.

▲6ㆍ25사변 당시 그분과 함께 공산당에 납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있었거나 평양감옥소에서 함께 수감 중 탈옥한 사람들의 증언을 비롯, 그밖에 상세한 정보도 수집돼 있으며 목격자들 중에는 생존자도 있다. 반면 월북에 대한 사실을 증명할 증거자료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 몇 줄의 추측기사밖에 없었다.

-이러한 납북사실을 정부에 알리고 해금을 요청한 일이 있는가.

▲지난 40년간 줄곧 정부 관계자들에게 진정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미루기만 해왔다

-납북문인에 대한 법적 규제조칙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6ㆍ25직후에 제정된「도서출판 및 판매금지」라는 임시조치법인데 대다수 남북문인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납북 후 정시인의 생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정시인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정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편이었으며 정치인들을 경멸하곤 했다. 「부르조아 우익은 더러워서 싫고, 프로레타리아 좌익은 무서워서 싫다」는 말을 자주 했다.

-최근 정시인의 신앙시들이 발견돼 문학인들로부터 새로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그분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아는바가 있는지.

▲아버님의 신앙심은 열렬했다.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했으며 기도생활도 철저했다.

특히 노기남주교와 윤형중 신부, 양기섭 신부와 절친했으며, 그것이 계기가 돼「가톨릭청년」「경향잡지」「경향신문」등 교회매스컴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47년에는 노주교의 도웅을 얻어 부천에 소사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독실한 가톨릭신앙인으로 교회 일에 열심히 투신, 다수의 훌륭한 신앙시도 발표했는데 납북 후 교회는 정시인의 해금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납북 후 한국교회는 그분에 대한 모든 인연을 끊은 듯 했다. 한국가톨릭문학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큰 손실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의 신앙시비 하나정도는 세우는 것이 좋을듯하다.

금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