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찾아갔을 때 아우구스티노 마이어 추기경은 매우 당황하는 듯한 눈치였다. 이미 라틴어미사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로마 교황청이 에스페란토어 미사를 인정할 것이라는 것은 그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처럼 보였다”고 ‘국제 에스페란토어 사용자 위원회’(IKUE) 발행 잡지 「에스페로 카톨리카」(Espero Katolika)의 편집인 안토니오 드 살보는 말했다.
에스페란토어를 반대하는 사람은 비단 마이어 추기경 혼자 뿐만은 아니다. 교황청 내외의 다른 고위성직자들도 그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유태계 플란드인 라이저 루도보크 자멘호프(Zame-nhof)에 의해 고안된‘세계공통언어’인 에스페란토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그들의 고유언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됐다.
그러나 기회는 국제적 혹은 다국적 내지는 국가적 에스페란토 모임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허용된다.
성사 (聖事) 에 있어서는 아무런 승인이 없었다. 이에 대해 살보는 “고해성사 때 에스페란토어 사용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의 인정을 위한 노력이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더 이상 라틴어가 유일한 전례언어로 사용되기 어려웠을 때 에스페란토어 지지자들은 호기가 왔음을 느꼈다.
이와 때를 맞춰 에스페란토어에 의한 시험적인 첫 미사가 1966년 살쯔부르그의 에드워드 오카이너 대주교와 유고슬라비아 ‘반자 루카’의 교구장 알프레드 피클러에 의해 봉헌됐다.
그러나 1976년 풀란드대사가 참석한 가운데 이탈리아 북부 ‘마사가’(Massa)지역에서 있은 에스페란토어 미사는 교황청의 심경을 건드렸다.
1981년 현 아르헨티나 교구장대리 루이스안토니오 알레시오가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고 ‘국제위원회’가 조직될 때까지 에스페란토어에 관한 상황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바르샤바의 보좌주교 불라디슬로 미지올렉은 의장직 요청을 받았으며 동위원회가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인으로 지명됐다. 또한 1988년에는 에스페란토어 미사경본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드 살보는 “인정을 받기위한 우리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고 말하고 “지난해 9월 우리는 또 다시 교황청과 접촉했으며 지난 3월부터 에스페란토어 사용미사를 위한 규정을 재가되어있다”면서 “우리는 이것을 11월 8일에 공포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에스페란토어사용을 지지하고 있다. 전직 에디오피아 교황사절이었던 아일랜드태생의 페트릭 코브니는 “왜 교황청이 에스페란토어의 폭넓은 사용을 허용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에스페란토어를 지지하는 사람은 성지관리자인 프란치스꼬회의 카를로 체키텔릭, 헝가리 태생의 트랜실바니아의 대주교 죠지 야쿠비니, 보헤미아인 카렐 올체나섹과 밀도슬라브 비크, 91세의 추기경 프란티섹 토마세크 슬로바크파벨 등이다.
1976년 1월부터 바티칸라디오는 특히 중부동부유럽의 성직자들 중 에스페란토어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에스페란토어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많은 이탈리아 정치인들도 관념상의 장애라는 어려움에도 불구, 역시 에스페란토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크리스천 민주당원 오스카 루이지 스칼파로는 그가 교통부장관이었을 때 열차시간표에 에스페란토어를 소개한 적이 있다. 다른 크리스천 민주당원인 니콜라 사데스도 국제위원회의 의장인 두일로 마그나니와 함께 더욱 열성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두 에스페란티스트들 간의 협력관계는 폴란드의 비상사태시기인 1980년대 초기부터 시작됐다.
의회는 바르샤바에 식량수송을 계획했으며 에스페란티스트들은 우선적으로 트럭 1대분의 주요물품들을 바르샤바에 보냈다.
사회민주당원들은 학교 교과목에 에스페란토어 과목을 소개하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전례 없는 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것이 실현되지 않고 있다. 치체로와 그의 팬들만 한시름 놓을 뿐….
<외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