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신임 광주대교구장 옥현진 대주교] 삶과 신앙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22-11-22 수정일 2022-11-22 발행일 2022-11-27 제 3320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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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밴 절제와 배려… 하느님 공동체에 남다른 열정 지닌 목자
2011년 광주 보좌주교 임명
교구 곳곳 다니며 소임 다해

2011년 7월 6일 주교서품식 후 김희중 대주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옥현진 대주교. 광주교회사연구소 제공

“주님 은총 덕분에 사제로 살았고, 또 주님 은총 속에서 주교직을 맡게 됐습니다.”

2011년 5월 광주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을 때 옥현진(시몬) 대주교가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은총으로 살았고 은총 안에 머무르며 지금까지 오로지 목자로서의 한 길을 그 은총의 힘으로 걸어왔다. 이미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기에 “준비가 안 됐다”는 겸손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옥 배려’ 대주교

훤칠한 키에 반듯한 풍모, 단 몇 마디 말만 건네도 은근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한 옥 대주교는 유난히 온화한 미소가 어울린다. 주위의 많은 이들이 가장 자주 그를 묘사하는 말은 친절함과 다감함, 긍정적, 이웃에 대한 깊은 배려다.

옥 대주교의 사제서품 동기인 광주대교구 관리국장 김종대(안드레아) 신부는 “신학생 때부터 함께해 왔는데 이미 그때부터 별명이 ‘옥 배려’였다”고 말한다. 항상 모든 사람들을 잘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얼핏 조금은 원칙에 충실해 보이는데, 그것도 “마음이 여린데 밖으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려 했던 부분이 많다”는 설명이다.

그가 지닌 배려의 다른 이름은 섬세함이다. 윤관식(미카엘) 광주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은 “평소 아주 섬세하게 모든 신자들을 보살펴주시는 주교님”이라고 말했다. 그런 증언은 셀 수 없이 많다. 로마에서 유학 중일 때에도 부활과 성탄 때면 동기들에게 꼬박꼬박 축하카드와 편지를 보내고, 어버이날에는 안부 전화로 동기 사제 부모님들까지 챙겼다.

옥현진 대주교가 2021년 11월 2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폐막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온유함과 절제

주위에 한없이 따뜻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엄격하고, 매사에 신중함과 철저함을 기한다. 그야말로 외유내강과 절제의 미덕이 몸에 밴 탓이다. 9년 동안 로마에서 유학을 할 당시에도 학업에 온 마음으로 매진함으로써 수시로 장학금을 받았다. 광주교회사연구소를 맡았을 때에는 원로사목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구 교회사 발간의 토대를 닦았고, 숨겨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발로 뛰었다.

광주가톨릭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당시, 옥 대주교는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존경과 사랑을 함께 받았다. 영성이 흐트러진다며 술을 잘 입에 대지 않을 정도의 절제, ‘과하게’ 완벽해 보여 거리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세심하게 돕는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꼭 직원들을 위한 간식거리를 들고 들어오는 자상함도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옥 대주교는 하느님 백성이 이루는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다. 교구 사목국장 이정주(아우구스티노) 신부는 “12년 동안 보좌주교로 교구 사목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갖추신 분”으로서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와 함께, 교구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살아오신 분”이라고 말했다.

2019년 5월 12일 옥현진 대주교가 성소 주일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광주대교구 홍보실 제공

■ 복사가 즐거운 효자

옥 대주교는 아버지로부터 스스로에 대한 엄한 자세와 맺고 끊음이 확고한 강단을 물려받았다. 어머니로부터는 모든 이들에게 온화할 수 있는 여유와 배려의 자세를 배웠다.

무엇보다 그는 효자였다. 아버지가 약주를 하신 날에는 어김없이 대야에 물을 받아 발을 씻겨 드렸고,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에서 세뱃돈을 받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드리는 의젓함을 보였다. 아들이 주교직에 임명된 후에는, 그 무게를 함께 져야 할 부모님에 대한 걱정도 잊지 않았다.

옥 대주교는 1968년 전남 무안에서 2남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사제직을 소망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신동본당에서 복사를 서면서부터였다. 복사를 서며 제대 위에 앉아서 그는 뭐가 좋은지 그저 싱글벙글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빈혈로 쓰러진 친구를 숙직실로 업고 가 간호를 한다거나 친구들끼리 다툼이 있으면 항상 중재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의젓하고 대견한 품행으로 학교에서 선행상을 타거나 친구와 형제들 사이에서도 항상 사람들을 이끄는 역할을 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옥현진 대주교(오른쪽)가 2021년 3월 22일 봉헌된 미얀마 군부 쿠데타 철회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미사 중 김희중 대주교와 함께 미얀마 시민들과 연대하는 의미를 담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천상 사제로서 하느님 나라 위해

옥 대주교는 광주가톨릭대를 졸업하고 1994년 사제품을 받은 후 농성동·북동본당 보좌로 사목하고, 1996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교회사를 공부해 석·박사학위를 받은 후 2004년 귀국, 2년 동안 운남동본당 주임을 맡은 뒤에는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줄곧 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에 힘썼다.

그러던 2011년 5월 12일 옥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돼 주교로 서품됐다. 지금까지 12년 동안 옥 대주교는 전임 김희중(히지노) 대주교와 함께 교구 구석구석을 다니며 목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옥 대주교는 교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11월 19일 교구청에서 가진 조촐한 축하식 자리에서 전임 교구장인 김희중 대주교와 최창무(안드레아) 대주교,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기억하며 소임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옥 대주교는 “김희중 대주교님을 옆에서 보좌하면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곁에서 보면서 더욱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주교님처럼 평화의 일꾼으로 평화의 다리 역할을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 경청하는 공동체를 그리며

사제로서, 주교로서, 하느님 백성의 일치와 친교를, 주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헌신했던 옥 대주교는 교구의 미래에 대해서도 평신도와 수도자, 성직자가 모두 참된 하느님 백성을 이뤄나가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옥 대주교는 특히 교구가 2년 동안 진행하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대화’에 대해 강조하고, 현재 전 세계 교회가 걸어가고 있는 시노드 교회로의 여정을 더욱 충실하게 걸어나가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참된 시노드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2011년 5월 12일 주교 임명을 받던 날 기도하고 있는 옥현진 대주교. 광주교회사연구소 제공

■ 약력

1968년 3월 5일: 전남 무안 출생

1986~1992년: 광주가톨릭대 학사

1992~1994년: 광주가톨릭대 석사

1994년 1월 26일: 사제 수품

1994~1995년: 광주 농성동본당 보좌

1995~1996년: 광주 북동본당 보좌

1996~2000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 교회사 석사

2000~2004년: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 교회사 박사

2004~2006년: 광주 운남동본당 주임

2005~2009년: 광주교회사연구소장

2006~2011년: 광주가톨릭대 신학교 교수

2007~2010년: 광주가톨릭대 제1영성관장, 지도신부

2011년: 광주가톨릭대 제2영성관장

2007년~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2011년 5월 12일: 광주대교구 보좌주교(페데로디아나 명의 주교) 임명

2011년 7월 6일: 주교 수품

2012년 3월 14일~2018년 3월 7일: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위원장

2012년 3월 14일~현재: 주교회의 사회주교위원회 위원

2018년 3월 7일~현재: 주교회의 사회홍보위원회 위원장

2022년 10월 12일~현재: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위원회 위원장

2022년 10월 12일~현재: 주교회의 선교사목주교위원회 위원

2022년 11월 19일: 광주대교구장 임명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