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강좌 지상 중계-‘시노달리타스와 한국천주교회’] (5)교회와 민주주의:공론장과 공동식별의 사목적 요청

정리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2-11-22 수정일 2022-11-22 발행일 2022-11-27 제 332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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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초월하는 시노달리타스, 사회에 선한 영향력 미칠 수 있어
민주주의에 ‘다수결 원칙’ 존재하지만
권력 나누는 분권·숙의민주주의도 있어
상호 존중·공동선 중시가 기본 목표 
교회, 예언자적 규범 제시할 수 있어야
■ 오세일 대건 안드레아 신부(예수회·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소장 최영균 시몬 신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10회 과정으로 ‘시노달리타스와 한국천주교회’ 강좌를 열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회 오세일 신부(대건 안드레아·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교회와 민주주의: 공론장과 공동식별의 사목적 요청’을 주제로 한 강연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최근 교회 내에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만, 시노달리타스가 중시하는 상호 존중과 경청에 대한 방법과 절차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교회 공식 문헌과 신학계에서는 시노달리타스가 민주주의와 상당히 비슷하게 이해되고 있으며, 이 둘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시노달리타스는 다른 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점도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전 인류를 사랑하는 관점에서 하느님이 교회만 생각하고 인류는 생각하지 않을까?

1970~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교회와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활동했다. 한국 사회 민주주의 역사에서 명동성당은 민주주의 성지였다. 민주주의 역시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의 일부이고, 완전하지 않지만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체계를 통해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있어 유의미한 시사점 역시 존재한다.

시노달리타스 실현에 있어서의 현실적 도전

시노달리타스 교회 실현을 위한 부분에서 가장 큰 도전으로 꼽히는 것은 성직주의다. 사제 중심으로 교회 내 모든 일들을 추진하는 모습이다. 물론 사제들 모두가 이러한 독선과 아집에 빠져있는 건 아니지만, 성직자 중심의 교회 운영과 결정의 문화는 한국교회에서 쉽게 관찰된다.

그러나 시노달리타스 실현의 도전과 걸림돌에는 교회 일에 무관심한 평신도들의 태도 또한 지적될 수 있다. 개인의 안녕 혹은 내면의 평화만 구하려는 성향이 팽배해있다. 개인주의적 구원 의식 역시 성직주의 못지않은 함께하는 여정의 걸림돌이 된다. 세례 예식에서 사제는 “여러분은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라고 묻고 예비 신자들은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응답한다. 여기서 신앙은 알게 모르게 마음의 평화 혹은 개인의 구원을 의미한다. 귀찮고 골치 아픈 외부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개인의 평화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 뜻이 먼저일 때, 영적 평화와 위로를 하느님이 거저 주실 때가 있다. 시노달리타스는 교회 공동체와 세상에 대한 책임과 연대를 포함한다. 시노달리타스의 걸림돌이 성직주의라면, 성직주의 현상의 이면에는 공동체 문제에 무관심한 상태로 개인의 구원과 평화만 추구하는 신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을 것이다.

시노달라타스의 정신은 모든 신자와 성직자의 삶과 사명에서의 회심을 요청

시노달리타스 실현을 위해 교회 구성원들의 존재론적 회심이 요청되는데, 회심의 목적지향은 성찬례 양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성찬례는 나를 쪼개서 다른 이의 음식으로 먹히는 양식이었다. 생명의 양식 혹은 좋은 것을 함께 나누려는 존재와 행동의 양식을 우리는 성찬례에서 배울 수 있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나라라 할지라도 중요한 권력 이슈와 관련하여 타자를 잡아먹으려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먹힘 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그게 사랑이고 예수의 행동 양식으로써 시노달리타스의 요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공동선을 위해 정치 지도자에게 예언자적 정치 참여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이것은 권력이든 무엇이든 내 것을 잃더라도, 정의롭고 이타적인 가치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형식에서 다수결 원칙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파벌싸움이나 다른 의견은 어떤 공동체에서든 존재해 왔다. 성경에도 아폴로파, 바오로파가 존재했었다.

어떤 의견이 모인다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지도자나 성직자들이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다.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에서’라는 교계 제도의 원칙은 베드로 역할을 하는 교직자(교황 혹은 성직자)를 존중하되, 교직자가 듣지 못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을 함께 논의하며 교회 공동선을 향한 일치의 길을 함께 가야 한다는 의미다. 구성원들 간의 존중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바로 성찬례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한 시국미사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교회와 민주주의 함께 갈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과정은 자유와 참여에 기초하여 다수가 선택한 결정을 따르는 것이 기본 법칙이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선거에서 0.7%p 차이로 승리했다.

그런데 다수결에 의한 결정과 권력 점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권력을 차지하는 형식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이라면, 다수결에 의해 독점된 권력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국민들 공익을 위해 수행되도록 견제하는 장치도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분권이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의회와 행정부, 사법이 분리된다. 균형과 견제를 위해서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사하는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권력을 독점한 개인이나 일당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전체주의 혹은 독재정치라고 부른다.

우리 교회의 어른인 김수환 추기경께서 1974년 성탄 미사 때 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바로 독재로 가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였다.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정치적 현안에 대해 다양한 의견과 장단점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을 숙의민주주의라고 한다. 모든 성원은 상호 존중하고 특히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 능력을 자제해야 한다. 그것은 공동선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타인을 나와 다르다고 밀어내고 자기 힘만 유지하려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다. 힘겨루기가 만연한 세상에 대한 예언자적 목소리가 바로 시노달리타스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6) 그러므로 시노달리타스는 민주주의 이상의 초월적 가치가 있지만, 민주주의와 친연적인 부분도 공유하며, 민주주의 사회가 잘 완성될 수 있도록 많은 영감과 예언자적 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25항은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한 것인데, 듣지 않고 결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명제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으로, 경청하지 않으면 내가 믿는 취향과 성향대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의 걸림돌이 된다.

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모님이든 성령님이든, 공동체의 공감대가 마련될 때 시너지가 마련되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안 된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남들에게 군림하고 내가 힘 있다는 것을 과시하지만 ‘너희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돼야한다’는 예수님 가르침처럼 결정하는 것마저도 듣고, 고민하고 식별해야 한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주는 것이 예수님 통치방식이고 이게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민주주의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시노달리타스의 최종 종착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리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