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미리내성지와 강도영 신부 / 김대건 신부 현양 위해… 기념 경당 건립 숙원 이루다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2-09-20 수정일 2023-10-09 발행일 2022-09-25 제 3311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1896년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성인에 대한 관심과 공경심으로
미리내성지에 기념관 건립 추진
1928년 기념 경당 축복식 봉헌

미리내성지 토대를 마련한 강도영 신부.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 소장

신유(1801년)·기해(1839년)박해 때 신자들이 숨어들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어 살았던 교우촌.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가 순교사적지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면서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서울의 일명 왜고개에 안장됐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졌다. 이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작업이 추진되며 무덤이 발굴됐다. 이 자리에 1928년 당시 미리내본당 주임 강도영 신부(마르코·1863~1929)가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을 건립했다.

9월 18일 라리보 주교에 의해 축복된 경당은 성인의 묘역과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례 장소가 됐고 지금의 미리내성지를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미리내에 김대건 신부 기념관이 건립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한 강 신부의 노고가 배어있다. 순교자 성월을 맞아 현재 미리내성지가 한국교회 대표적인 순례지가 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한 강도영 신부에 대해 알아본다.

“미리내에 있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 사제의 옛 무덤에 기념관을 짓는 데 대해 황해도의 어떤 신부들은 ‘무엇 때문에 산골 구석 미리내에 (기념관을) 짓느냐, 용산(즉 순교지인 용산 새남터)에 지으면 참배하기 쉬우니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미리내에 짓자는 것도 아니고, 작년에 이 일로 약조한 돈을 내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몇몇 신부들이 낸 돈은 당가(경리) 신부에게 맡겨놓았고, 미리내냐 용산이냐는 주교님의 뜻에 달렸다.”(「뮈텔문서」 1922~75, 강도영 신부의 1922년 5월 30일자 서한)

1846년 미리내에 조성된 김대건 신부 무덤은 1882년 이후 진행된 기해·병오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 수속(교구 재판) 판사 푸아넬 신부에 의해 1886년 개봉된 적이 있다. 이후 1901년 푸아넬 신부와 당시 드망즈 신부가 와서 안성본당 공베르 신부, 미리내본당 강도영 신부 및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발굴을 진행했다. 유해는 무덤에서 나온 관과 함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됐다.

1921년 교황청은 김대건 신부가 포함된 기해·병오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추기경회의 첫 번째 단계인 전(前) 예비회의를 개최했고, 한편 서울에서는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들에 대한 교회(교황청) 재판이 시작됐다. 이런 흐름에서 그해 5월 5~9일 열린 한국인 사제 피정 때 김대건 신부 현양을 위한 기념관 건립이 결정됐다. 장소는 용산 새남터와 미리내 두 곳이 거론됐는데, 미리내는 강도영 신부가 제기한 것이었다.

「미리내성지 소식지」 등 기록에 따르면 그때 강 신부는 “불과 몇 시간 동안 계시다가 치명하신 새남터보다는, 55년(1846~1901)이라는 세월을 묻히고 살이 썩은 미리내에 경당을 세워야 합니다…. 당시 김 신부님의 시체를 모셔온 미리내 교우들의 열성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경당은 미리내에 세워야 합니다”고 주장해 뮈텔주교 마음을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 신부는 또 1923년에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미리내에 안장된 페레올 주교 무덤과 김대건 신부 무덤 자리가 있는 산, 일명 오두재를 교회 공동묘지로 허가받을 수 있도록 드브레 부주교에게 요청해 결실을 얻었다.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신부 기념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런 노력으로 강 신부는 결국 여러 사제로부터 기념관 건립에 대한 호응을 얻어냈고 지역 회장과 유지들도 경당 건립 기금을 모금할 만큼 공감대를 모았다. 마침내 1928년 9월 ‘치명자의 모후’를 주보로 축복식이 봉헌됐다. 강 신부의 순교자 현양 정신과 노력이 그 바탕이었다.

기념 경당은 1929년 1월 인근 본당 청년과 어린이 70여 명이 순례 미사를 봉헌한 것을 비롯해 건립 후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순례지가 됐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현 미리내성지의 직접적인 기원도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1896년 4월 26일 세 번째 한국인 사제로 서품된 강도영 신부는 그해 5월 20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후 선종할 때까지 34년 동안 이곳에서 사목했다.

1921년 은경축 감사 답사를 살펴보면, 강 신부는 미리내본당에 부임하면서부터 페레올 주교와 순교자 김대건 신부 묘소가 있는 곳에서 사목하게 된 것을 의미 있게 생각했다. 미리내본당에서의 사목이 곧 김대건 신부에 대한 관심과 공경심으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무덤이 발굴되고 사제관에 유해를 안치했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유해가 옮겨지는 과정은 김대건 신부 시복을 위한 자발적인 현양 운동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강 신부는 이외에도 1907년 현재의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을 자연석으로 완공해 축복식을 거행했고, 교회 교리학교와 애국 계몽운동으로서의 개량 서당 성격을 지닌 해성학원을 건립했다. 또 외교인들에게 양잠과 농업 기술을 가르치는 등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헌신적인 사목을 펼쳤다.

1929년 공소 순방길에 걸린 병으로 67세 나이에 숨을 거둔 강 신부는 34년 성직 생활을 바친 미리내에 묻혔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