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 여름휴가 어떻게 보냈을까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7-13 수정일 2022-07-13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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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로 사목활동 멈춘 여름… 계곡 그늘에 앉아 망중한 즐겼다

다블뤼 주교, 편지에 조선의 여름 묘사
교우들과 돗자리에 앉아 담소 나누고
나무그늘 아래 실개천에 발 담그기도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 기슭의 모습. 이곳에 있는 손골성지는 서양 선교사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했던 곳 중 하나다.

프랑스 선교사 도리 신부는 1865년 5월, 어느 화창한 봄날 조선에 도착한다. 신자들이 준비한 쌀밥 한 그릇과 큼직한 닭다리를 반찬삼아 식사를 한 뒤 가마를 타고 베르뇌 주교를 만나러 가는 길. 도리 신부는 “가마 안에서 두 다리를 접어서 깔고 앉아야 하는 양반 다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어딜 가나 도로 사정은 나빴는데 그런 길을 사흘 동안 걸은 끝에 오후 세 시경, 수도 서울의 관문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밝힌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과 조선인에 맞춰 지어진 작은 집, 조선에서 입고 신어야 하는 상복과 짚신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낯설지만 흥미로운 경험이 됐다. 그렇게 조선에서 사계절을 보낸 서양선교사들에게 무더위로 잠시 사목방문을 쉴 수 있는 여름은 조선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낯선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며 쉬지 않고 사목방문을 했던 서양 선교사들은 산세가 수려한 교우촌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150여 년 전, 조선에 정착한 서양선교사들의 여름나기를 소개한다.

무더위 이겨낼 수 있었던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

한국이름으로 안돈이(安敦伊)라 불렸던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1845년 조선에 도착해 21년간 활동했던 그는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 가장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에 정착한 지 8년이 지났을 무렵인 1853년 9월 18일, 그가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선에서의 매력적인 여름나기가 상세히 묘사된다. 지독한 가뭄으로 비 소식 없이 32도에서 34도를 오가는 무더위 속에서 여름을 나야 했던 다블뤼 신부. 그러나 그는 “아주 즐겁게 여름을 보냈다”고 전한다.

“저는 매일 해 질 무렵이면 마을 입구로 나가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서있는 나무 밑으로 갑니다. 그리고 남자 교우들이 거의 다 나와 제 곁에 모입니다. 우리는 돗자리 위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기분전환을 하며 서늘한 저녁 시간을 보냅니다.… 또 어떤 때는 참외를 먹습니다. 이 나라에는 작은 멜론 같은 것이 있는데, 길이와 굵기는 팔뚝만하고 엉덩이만 합니다.”

참외 200개를 한꺼번에 사서 마을의 교우, 그리고 아이들과 나눈 다블뤼 주교는 “얼굴을 파묻고 와작와작 소리를 내며 참외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을 짓기도 하고 옥수수를 함께 먹으며 무더위를 이겨냈다.

교우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늘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는 편지에서 교우들과 밭에서 노래자랑을 함께한 이야기도 소개한다.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를 떠나서 그 시간은 항상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합니다. 박수치는 청중도 있고, 유럽의 플루트와 같은 퉁소나 갈대피리 따위의 악기로 노래솜씨에 맞춰 반주를 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오락시간에 부모님이 함께 하셨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기엔 부모님이 이해하시기에 힘든 매력이 있거든요.”

조선의 여름이 간직한 아름다운 풍경은 다블뤼 주교에게 멋진 휴가를 선물했다. 녹음진 나무그늘 아래로 꼬불꼬불 흐르는 실개천에 발을 담그고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는 교우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기도 했던 다블뤼 주교는 “저에게 이렇게 매력적인 위안거리가 있을 줄이야 부모님이 아셨다면 얼마의 비용을 치르더라도 이것들을 프랑스로 실어가 함께 누리고 싶으실 겁니다”라고 전한다.

오메트르 신부가 1864년 9월 16일 손골에서 보낸 서한에 첨부된 한글 자모.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에서 보낸 짧은 여름을 영성생활에 힘쓰며 보냈다. 1863년 조선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위앵 신부와 함께 자수,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다. 3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에서의 전교에 최선을 다했고, 기도와 영적독서를 하며 여름을 보냈다.

오메트르 신부가 1865년 10월 가르멜회 원장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는 조선에서 여름을 보낸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메트르 신부는 “묵상, 미사, 아침 식사, 시과경, 묵주 기도, 복사와 조선어 공부, 그리고 정오까지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습니다”라고 전할 뿐 아니라 “점심 먹기 전후에는 영적독서를 하는가 하면 저녁기도와 끝기도, 신학공부, 성경읽기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고 덧붙인다.

신자들과 만나는 일도 중요한 일과 중 하나라고 전한다.

“12, 16, 20㎞ 떨어진 곳으로 병자성사를 주러 갈 때도 있고 주일이나 축일에는 미사를 봉헌하고 고해를 들어야 합니다. 동료가 저를 보러 오기도 하고 제가 동료를 보러 갈 때도 있습니다. … 아주 드물고 아주 힘들게 만나는 만큼 이런 방문은 더더욱 즐겁습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영혼과 정신과 육체를 회복시키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이처럼 오메트르 신부는 여름 동안에도 교우촌 순회방문을 쉬지 않았고 잠시의 휴식기 동안 동료 선교사들과 만나며 활력을 찾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들, 어디서 쉬었나?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 자리한 손골성지는 서양선교사들이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했던 곳 중 하나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은거하기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손골은 1857년부터 1866년까지 5명의 선교사가 다녀갔다. 손골 공소가 본격적으로 조선말과 풍습을 배우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 이후이다.

1857년에 입국한 페롱 신부와 1861년 입국한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 1863년에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조선말을 배우고 사목 준비를 위해 손골로 보내졌다. 1865년에 입국한 도리 신부도 손골에서 시간을 보냈다. 선교사들은 손골에 머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응기간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사목방문을 쉬었던 여름철 농번기에는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 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했다.

다블뤼 주교가 손골에서 보낸 1853년 9월 18일 편지에는 손골의 아름다운 풍경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마을에서 나와 몇 백 발걸음 어쩌면 천 걸음일지도 모를 거리를 가면 예쁘고 아담한 장소가 있어요. 그곳엔 꽤 높은 바위 두 개가 있는데, 두 바위 사이로 물이 흐르고 바위 주변은 관목들로 완전히 뒤덮여 있으며 거기엔 아무도 모를 사각의 공간이 숨겨져 있어요. 거기엔 마침 작은 폭포도 있는데요. 높이가 대략 두 자밖에 안 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이 있답니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에 자리한 미리내성지도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가 여름을 보냈던 곳이다. 1865년 10월 미리내에서 편지를 부친 오메트르 신부는 “여기 산이 풀과 꽃으로 뒤덮이면 얼마나 아름다운지, 때때로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말씀드릴 수 있지요”라고 가르멜회 원장 수녀에게 전하고 있다. 특히 여름 동안 이곳에서 피정도 하고, 언어와 신학 공부도 하며 작은 안식을 찾았음을 편지를 통해 전하고 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