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39)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 두 번째 이야기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07-12 수정일 2022-07-12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1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미사 거행하는 마음과 태도에 달려있다
사제가 복음 선포 사명 잊고
지위와 서열에 집착해선 안 돼
미사와 신앙 교육에 힘 쏟고
하느님과 사람의 ‘매개자’ 돼야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가 6월 24일 서울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사제 성화의 날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사제는 미사 집전자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변화와 쇄신의 지름길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성직주의를 둘러싼 어떤 풍경

시노달리타스에 관한 교구별 경청 모임 때 가장 많았던 의견 중의 하나가 성직주의에 대한 호소였다고 한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말할 때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가 성직주의 문제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성직주의 폐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교회 안팎에서 성직주의는 늘 공격받고 있다. 너무 자주 언급되고, 너무 쉽게 공격받고 있어서 이젠 오히려 관성이 생길 정도다. “그래 성직주의가 문제야.” 이 말 한마디로 모든 토론이 종결되어버린다. 개념화가 갖는 난제다.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황과 현실을 흔히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 개념화는 축소 환원의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성직주의를 발생하게 하는 교회 안의 구조와 문화가 무엇인지, 또 성직주의 때문에 초래되는 교회 안의 부정적인 경향과 문화들이 무엇인지, 성직주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사제 직무 수행의 문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들은 사라지고, 그저 성직주의라는 개념 하나를 언술함으로써 더 이상의 진전이 없게 된다. 즉, 원인과 과정과 결과의 내용은 사라지고 개념만 남아서 소비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로 살아가면서 성직주의에 대해 말할 때마다,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을 들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나 역시 교회의 쇄신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자주 성직주의 문제를 언급한다. 사제 스스로 성직주의를 말함으로써 일종의 방어기제를 형성하려는 무의식이 숨어있는 것인가? 자신은 성직주의의 폐해와 무관한 사제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위선과 비겁함이 내재한 것인가? 정말 나는 성직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성직자로 살아가는 이상 알게 모르게 성직주의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교구 사제 피정 때 한 젊은 사제의 호소가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피정 강의 때 성직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이야기했었다. 질문 시간에 그 신부가 하소연했다. 성직주의라는 말을 점점 듣기 싫어진다고 했다. 사제로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만, 예전의 선배 사제들이 누렸던 일종의 특권의식이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오늘의 청년 세대들은 사제를 그저 여러 명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지 따로 특별하게 더 우대하지 않는다고, 사목의 현장에서 같은 세대의 신자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늘 옛 세대들과 살기 때문에 가끔은 힘들다고, 특권적 자부심과 우월적 소명의식으로 살아갔던 선배 사제들과는 달리 요즘의 젊은 사제들은 안팎의 공격 속에서 자긍심을 갖기가 점점 힘들다고 말이다. 젊은 사제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 많이 미안했다. 우리 세대의 사제는 한국교회의 가장 활발했던 시대와 사제성소의 전성기를 살아왔다. 점점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교회의 상황과 급격히 줄어드는 사제성소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사제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여겨졌다.

■ 사제 직무에 대한 새로운 이해

사제 직무에 대한 신학의 이해와 설명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은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관점에서 사제 직무를 설명해왔다. 하지만 오늘의 신학은 구성적이고 기능적인 관점에서 직무 사제직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의 사명 수행을 위한, 일종의 목적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사제 직무를 설명한다. 교회의 사명과 직무와 교계적 질서(Hierarchical order)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직무와 위계적 서열은 사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사제의 직무(Priestly ministry)는 교회의 직무(Ecclesial ministry) 안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백성을 섬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를 강조한다. “직무 사제직은 예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봉사하시고자 쓰시는 하나의 수단”이며, 직무 사제직의 “핵심 축은 지배를 의미하는 권력이 아니라 성체성사 집전 권한이다.”(「복음의 기쁨」, 104항)

■ 사제의 변화와 쇄신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사제직의 존재론적 차원과 본질적 차원에 대한 강조보다 사제직의 목적과 지향에 더 집중하는 데에 있다. 사제직의 목적과 지향은 복음 선포 사명에 있다. 사제가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망각하고 사제의 존재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 위계적 서열에 집착하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제성소의 길을 시작했을 때의 그 순수했던 원의와 지향을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살아내는 일이 쇄신을 향한 하나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사제는 미사를 집전한다. 집전자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변화와 쇄신의 지름길이다. 반복되는 직무에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일은 쉽지 않다. 자칫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미사를 거행할 위험이 많다. 하루의 일과에 지친 몸과 마음의 상태에서도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위해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고 축복하는 마음과 태도로 미사를 정성 들여 거행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사제는 거룩해질 것이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의 마음과 태도에 달려있다.

사제는 신앙 교육자다. 사제는 신자들의 신앙 교육과 신앙 성숙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미사가 가장 큰 신앙 교육의 장이다. 하지만 미사 밖의 장에서도 신앙 교육에 힘써야 한다. 오늘의 교회 현실 속에서 사제가 과연 얼마나 신앙 교육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교육은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다. 참교육은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신자들과 함께, 동료 사제들과 함께 공부하는 사제의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이다.

사제는 무엇보다 매개자(Mediator)다. 신학적 의미의 ‘중재자’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는 존재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다. 사실, 현실의 사제는 인정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쉽다. 늘 본당 공동체의 중심으로 살아와서, 모든 시선과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지기를 원하는 태도가 몸에 배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사제들 간의 갈등 역시 인정 투쟁에서 빚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제는 중심이 되기보다 변방에서 연결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회 구조와 성직자 문화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조금 슬프다.

목적과 지향을 기억하고, 미사에 정성을 기울이고, 신앙 교육에 힘을 쏟고, 중심이 아니라 연결하는 삶을 살아갈 때 사제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가져오는 촉매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변화와 쇄신을 위해서 사제의 변화와 쇄신은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하다. 사제 공동체 안에 공부와 성찰의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신학교 교육과 사제 지속 양성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사제의 변화와 쇄신을 향한 길은 여전히 멀다. 세상과 환경이 강요하기 전에 우리 사제들이 변화와 쇄신의 길을 먼저 시작할 수는 없을까.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