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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2. 두봉 주교(2)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5-24 수정일 2022-05-24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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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후임 주교님 청으로 되돌아온 안동교구
성당 없는 경북 의성 봉양에 자리잡아
‘두봉 천주교회’ 문패 달고 24시간 개방
거실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 봉헌

두봉 주교가 자택인 ‘두봉 천주교회’ 거실에서 마을 교우들과 함께 봉헌할 미사를 준비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주님! 반갑습니다, 여러분.

예전부터 저를 ‘드봉’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았는데요. 유명한 화장품 이름이어서 기억하기 더 쉽거든요. 그런데 제 이름은 ‘두봉’(杜峰)입니다. 제 프랑스 성이 뒤퐁인데요, 선배 신부님께서 발음이 비슷하니 유명한 중국 시인 두보처럼 ‘두’씨로 이름을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권해주셨어요. 제 이름 한자를 풀이하면 ‘산봉우리에서 노래하는 두견새’란 뜻이 된답니다.

한국에도 두씨가 있긴 한데요, 저는 봉양 두씨의 시조입니다. 제 호적에 봉양 두씨라고 적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이자 프랑스인입니다. 국적을 두 개 갖고 있어요. 2019년에 저에게 한국 국적을 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예외적이지요. 정부에서 ‘한국을 위해 특별히 공헌한 외국인’이라고 인정해서 줬다고 합니다. 프랑스 이름 뒤퐁은 ‘다리 옆에’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요. 많은 분들이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뜻인 것 같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 또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의성 문화마을에 있는 ‘두봉 천주교회’에서 삽니다. 제가 그렇게 문패를 달았습니다. 24시간 대문도 열어두고요. 이 지역엔 다른 성당이 없어서 제가 사는 집 거실을 성당처럼 사용하고 있거든요. 동네 교우들과 같이 미사도 봉헌하고. 너무 넓고 예쁜 집이어서 저에겐 과분합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안동교구에서 지어준 것이기에 기꺼이 살고 있습니다. 매일 오전엔 집 앞 텃밭에 나가는데요. 제가 농부는 아니어서 대단한 걸 키우지는 못합니다만 꾸준히 밭을 일구고 각종 작물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두봉 천주교회’라는 문패가 걸린 집의 대문은 24시간 열려있다. 단순히 두봉 주교의 거주지를 넘어서 의성 문화마을의 공소 역할도 하는 곳이다.

저는 안동교구가 신설되면서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는데요. 사실 정말 맡고 싶지 않은 소임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이끄심이었기에 순명해야 하니, 교구가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10년만 교구장직을 수행하겠다 했었습니다. 그런데 기간이 20년이 되었지요. 제 후임 교구장이 박석희(이냐시오) 주교님이었어요. 후임 주교님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저는 교구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안동을 떠났고,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행주공소에서 꽤 오래 살았습니다. 그 당시 서울대교구장이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님이셨는데요. 저와 자주 교류하고 친하게 지냈기에, 제가 추기경님께 안동에서 떠나면 머물 수 있는 작은 공소 같은 데를 좀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행주공소(당시 서울대교구, 현재 의정부교구 소속)였어요.

행주공소는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래는 본당이었는데 6·25전쟁 후에 신자 수가 줄면서 공소가 됐다가 지금은 다시 본당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거기서도 교우들과 매일 미사를 드리고 피정 지도도 하며 아주 재미나게 친교를 나누며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박 주교님의 뒤를 이은 권혁주(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 고향으로 다시 오라고 간곡히 권해주셨고, 교구에서 땅을 사서 이렇게 집도 지어줬습니다. 우리 교구로 돌아올 때, 저는 경북 의성군 봉양면 쪽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었는데요.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이 지역에 성당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저는 선교사거든요.

신학생 시절, 저는 노동사목을 하는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의 이끄심은 저희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선 제가 선교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셨던 것이죠. 제가 교구 신학생이었기에 원래는 교구에서 필요로 하는 사제 소임을 맡아 활동했을 텐데 말이죠.

언제 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냐고요? 왜 사제가 되고 싶었냐고요? 기억을 더듬어봐도 사제가 된 특별한 이유 같은 건 떠올려본 적이 없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느님 뜻에 따른 결과라고 할까요.

하느님을 깊이 믿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매우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저희 남매들도 신앙 안에서 자랐습니다. 저희 집에선 7남매가 함께 컸는데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사촌동생 2명이 저희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5남매에서 7남매가 됐습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께선 매일 일하시느라 바쁘셨지만, 신앙생활은 그 누구보다 성실히 하시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으로서 평생 남을 돕는데 헌신하며 사셨습니다. 가난한 집안 상황에도 저는 가족 모두의 배려 덕분에 사제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약 하느님께 칭찬을 받는다면, 가장 칭찬받을 일은 사제가 되고 사제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