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그분의 초대 / 이명환

이명환(사도 요한나) 시인,
입력일 2021-12-01 수정일 2021-12-01 발행일 2021-12-05 제 327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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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세 살 위 언니 수녀님이 있다. 형제가 칠남매나 되다보니 시기적으로 나와 동고동락한 이 언니와는 공유하는 추억도 많아 사이가 각별하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집안이었는데 언니는 여고 졸업 후 혼자서 성당에 나가다가 영세를 하더니 수도자까지 됐다.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가족들은 언니의 출가를 가출 정도로 치부하면서 어떻게라도 말려보려는 쪽으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즈음 대학 신입생인 나는 인근 어디서나 시야에 들어오는 명동성당의 십자가 첨탑을 안 보려고 애써 눈길을 피했다. 언니가 들어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원이 바로 그 성당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에 성실해서 어른들, 특히 아버지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언니. 그런 언니가 수녀가 된지 5년만의 첫 휴가 때 집에 와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내 혼사(婚事)의 반은 성사시키고 돌아갔다.

“아니 그 사람을 언제 봤다고 언니는 이렇게 정신없이 밀어붙이나?”

나와는 별 대화도 없이 우선 시골에 계신 고집불통 할아버지부터 설득하러드는 게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싫은 소릴 했더니, “내가 너를 모르냐? 수녀원에 오기는 글렀고 더 이상 헤매는 꼴을 볼 수 없다 싶었는데 휴가 첫날 우연히 네 책상에 있는 책갈피에서 그 사람 편지를 봤어.”

글씨며 내용이며 이런 사람이 네 곁에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이번 휴가에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정했으니 그리 알라 한다. 게다가 몇 번 정독하는 사이 이분이 하느님께서 네게 보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는 데야 나도 할 말이 없었다.

직접 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더니 일사천리로 진행시켰다. 헌데 호사다마랄까. 마지막 단계에서 신앙문제가 걸림돌로 나타났다. 언니가 신앙문제를 거론하자 그는 난색을 표하며 거부의사를 보였던 모양이다.

대대로 유교적 전통의 종손 집 장손인데다가 그가 존경하는 은사 김규영 토마스 교수님의 간곡한 권유도 마다한 사람이라 개종 문제는 단순치가 않았다. 시간이 없는 언니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성당에서 혼배미사 안하는 혼례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수녀원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 나는 이 사람이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혼인이라는 것을 할 마음이 아니었다. 뭐랄까. 스스로 꼬인 인생으로 치부하고 혼자 글이나 쓰면서 외롭게 살 팔자로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취직할 생각도 안하고 짐 챙겨 고향으로 내려가는 나더러 할머니는 또 ‘심즉운명’(心卽運命)이라며 혀를 찼다. 이 말은 할머니의 인생철학이자 트레이드마크다.

그에게 너무 집착하는 언니와 헤어지면서, “단순히 신자가 되기를 꺼린다기보다 자기의 창작활동에 장애물이 될성부른 것은 일체 거부하는 자유인, 말하자면 예술지상주의자로 이해하라고. 내게 더러 호감을 가지고 편지를 보내기는 할지언정 개종할 사람은 아니니 언니도 희망을 버려.”

내 충고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수녀원으로 갔다. 그런데 언니의 기도덕택인지 어느 날 가톨릭에 입교하겠노라는 뜻밖의 소식이 왔다. 그의 성격을 아는지라 이것은 반갑다기보다 내 운명에 불어 닥친 태풍일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예감이었다.

1966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함께 영세하고, 12일 명동성당에서 성찬경 사도 요한과 혼배미사를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기완(엠마누엘), 기선(이냐시오), 기영(아가빠), 성기헌 바오로 신부, 기우(프란치스코) 5남매를 무탈하게 키워주시더니 2013년 2월 26일 갑자기 사도 요한을 불러 가셨다. 나 요한나는 하늘에서 그와 상봉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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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환(사도 요한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