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심포지엄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21-11-02 수정일 2021-11-03 발행일 2021-11-07 제 326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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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가계의 거처·신학교 생활·사목활동’ 
성인 발자취와 행적 다각도로 살펴본 ‘순례의 대화’
김학렬 신부  “이의창, 이병교·이덕경으로 이름 바꾸며 복사 레오로 헌신한 분”
김정숙 교수  “탁월한 능력 지닌 김대건 신부… 전적으로 교회에 봉헌한 삶”
원재연 교수  “교육 장소·과목·교수진 변화에도 비교적 성공적인 신학교 체제 운영”

10월 28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제7차 심포지엄을 마치며 교구장 이용훈 주교(가운데)와 이성효 주교(왼쪽), 문희종 주교(오른쪽)가 마침 강복을 하고 있다.

10월 28일 수원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김대건 신부 가계의 거처와 신학교 생활과 사목활동’을 주제로 심포지엄이 열렸다. 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은 김대건 신부님의 발자취와 행적을 따르는 새로운 ‘순례의 대화’였다. 성인의 삶이 다각적으로 살펴졌던 심포지엄의 발제 내용을 정리해 본다.

■ 성 김대건 신부의 복사 이의창 레오 순교자 - 김학렬 신부(수원교구 원로 사목자)

이의창의 세례명은 량(良), 레오였다. 이의창은 1845년 1월 김대건 부제 입국 초부터 복사가 되어 이후 상해로 가서 사제품을 받고 돌아올 때까지도 항상 동행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협력하며 활동했다.

교회 기록에는 이량(레오)으로 드러난다. 「병인치명사적」 등 문초에서 밝혀진 이량은 이덕경과 이병교로 개명했던 동일 인물이다. 이의창이 개명한 이름은 이덕경인데, 포도청에서만 이병교라고 둘러댄 것이었다.

그는 병오박해로 피신하면서 이덕경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 그리고 리델 신부와 드게뜨 최 신부에 이르기까지 복사 레오로서 충실히 활동했다. 마지막에 드게뜨 최 신부 일을 돕다가 공주에서 잡혀 서울 포도청에서 1879년 67세로 순교했다.

이제까지는 이의창의 세례명을 베난시오로 알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 옥중편지를 잘못 해독해 이의창의 세례명은 베난시오로만 드러났고, 이처럼 세례명이 달랐기에 이의창과 이병교라는 두 이름을 연결 지을 수 없었다. 현석문이나 이재의가 그랬듯이 이덕경으로 개명해 자신을 감췄다. 박해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자녀들에게도 철저히 숨기기를 강조함으로써 가문의 구전마저 사라져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왕조 치하 순교 133위 중 하느님의 종 이병교 레오는 이의창 레오로 생각할 수 있다.

■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과 그 가족의 생활 - 김정숙 교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김대건 신부는 탁월한 능력으로 교회 업무를 처리하면서 조선교회 부주교 역할까지 감당해 냈다. 동시에 늘 신부의 사명감을 깨닫고 당당했다. 또 모친 고 우르술라와 동생의 생활을 통해 김대건 신부의 교회에 대한 전적인 봉헌과 가족 간 절제된 사랑을 볼 수 있다. 모친과 남동생 모두 하늘에 목표를 두고 속세를 절제로 마감했고 그렇게 직계 가족이 절멸했다.

김대건 신부는 ‘다리’가 된 사람이다. 기해박해 이후 공백을 다시 교회 체계 안으로 세우는 기초가 됐고, 선교사와 교우들을 이어주었으며 세계와 한국교회를 이어주었다. 또 조선 조정에는 새 문화에 대한 충격을 가져다주었으며, 무엇보다 조선인이 신부가 되는 길을 보여줬다. 김대건은 소년 시절 처음으로 대하는 외국 문물, 그것도 어린 시절에 닥친 경이로움을 감사와 책임감, 자기 정체성으로 바꾸었다. 26세에 순교하고 그의 직계들까지 절멸하면서 내어놓은 김대건 신부의 삶에 어린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잘 쓰신 드라마 같다.

성인은 스스로를 용인 사람으로 인식했고 또 당시 용인지역 신자들도 김 신부를 자신의 지역인으로 인식했다.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 연고지로 가장 일찍 기념된 장소다. 1896년 미리내본당이 서게 됐고 1928년 김대건 신부 경당이 세워졌다. 조선교회가 힘을 합쳐 세운 경당이다. 수원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땀과 피가 닿아 있는 곳을 찾아 복원하고 있다.

■ 한국교회 최초의 해외 유학생 김대건과 최양업의 신학교육에 대하여 - 원재연 교수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교는 1837년 6월 7일 중국 광동성 마카오에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건물 내에 설치됐다. 르그레즈와 대표 신부는 1837년 6월 당시 대표부에 머물던 조선선교사 칼르리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개설 초기 조선 신학생 교육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전담시켰다.

이처럼 박해기 조선에서 이뤄진 신학교육은 ‘해외 파견 유학’에서 시작됐고, 비슷한 시기 ‘국내 도제식 신학교육’이 이뤄지다가 후에 ‘국내 신학교 교육’이 실시되는 3단계 순서로 추진됐다.

1837년 연말 입국한 앵베르 주교가 1839년 기해박해 직전까지 조선에서 속성 신학교 과정을 개설한 것과 김대건 성인이 부제 때 1845년 1월부터 4월까지 4명 신학생을 두고 2명을 직접 숙소에서 가르친 것도 국내 도제식 신학교육에 속한다. 1855년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설립해 1866년 병인박해 직전까지 유지된 배론신학교는 정식 개설된 ‘국내 신학교 교육’의 효시다.

박해기 조선신학교는 교육 장소가 변하며 교수진과 학습과목도 변했다. 또 한양에서 마카오로, 마카오에서 필리핀 마닐라로, 다시 마카오로 그 뒤 상해와 남경을 거쳐 백가점, 소팔가자로 이동해 가면서 어려움이 컸지만, 3명 중 2명이 예비신학교-소신학교-대신학교의 3단계 과정을 잘 이수하고 차례로 서품됐다는 점은 비교적 성공한 신학교 체제였다고 평가된다.

한국교회 제1세대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배출한 조선신학교는 뒤이어 실시된 ‘국내 도제식 사제 교육’과 ‘국내 신학교 교육’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오늘날 한국교회 신학교의 모태가 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