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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다시 보기] 2. 서한에 드러난 마음

박지순 기자
입력일 2021-09-07 수정일 2021-09-07 발행일 2021-09-12 제 3261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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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을 향한 가엾은 마음, 눈물로 눌러 쓰다
신학생 시절부터 선종 전까지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 담겨
박해 피해 교우촌 찾아다니며 밤새 성사 주던 모습도 기록돼
고통받는 신자들 염려하는 비통한 심정 절절히 느껴져
조정의 부패상 날카롭게 비판 백성들의 애환에도 통감해

‘우리 교회의 국보급 유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서한을 판독하고 국내로 들여오는 데 큰 기여를 한 고(故) 최승룡 신부가 최양업 신부 서한을 평가한 말이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서한은 그의 생애와 사목활동, 신심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1차 사료일 뿐만 아니라 박해시기 교회 상황과 조선 정치현실까지 알려 주는 귀중한 사료다. 샤를르 달레 신부도 「한국천주교회사」를 쓰면서 최양업 신부 서한을 자주 인용했다.

이렇듯 최양업 신부의 활동, 신앙과 영성이 온전히 표현돼 있는 서한을 살펴본다.

■ 최양업 신부 서한 알기

최양업 신부 서한은 기존에 19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2009년)에도 서한 19통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된 서한은 모두 21통이다. 2012년 서울대교구 고(故) 최승룡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 방문해 최양업 신부 서한 2통 원본을 직접 확인하고 복사한 사본을 입수했다. 새로 발견된 서한 2통은 「교회와 역사」 2013년 8월호에 라틴어 원문 전문과 우리말 번역문(번역 김상균 신부) 및 해제(방상근 박사)가 실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서한 21통의 작성 시기는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신분이던 1842년 4월 26일부터 선종 전해인 1860년 9월 3일까지다. 서한은 모두 유창한 라틴어로 작성됐고 발신 장소는 마카오, 심양, 홍콩, 상해 등 국외가 6통, 도앙골과 절골, 소리웃, 안곡 등 국내가 14통, 장소 미상이 1통이다.

서한 수신자는 기존 19통 중 14통이 르그레즈와 신부, 4통이 리브와 신부, 1통은 두 신부 공동이다. 2013년 새로이 발견된 2통은 베롤 주교에게 보낸 것이다. 수신자 모두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현재 기존 19통 가운데 발신 장소를 알 수 없는 1통을 제외한 18통은 파리 외방 전교회가 1997년 6월 23일 한국교회에 기증했고 같은 해 7월 1일 한국으로 전달돼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 영구히 보존하게 됐다. 2013년 새롭게 공개된 서한 2통 사본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최양업 신부 서한의 가치에 대해 “사료적으로는 성 김대건 신부 서한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다”며 “선교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살랐던 젊은 사제의 신심과 기도지향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정갈한 라틴어 필체에서 모범적인 신학생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최양업 신부님이 조선교회 신자들에게 한글로 쓴 서한도 있을 듯한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 아홉 번째 서한은 발췌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쓴 세 번째 서한과 봉투. 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쓴 것이다.

■ ‘착한 목자’ 최양업

“저의 동포들이 마침내 시온성으로 회두하여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세주이신 하느님을 찬송할 날이 언제쯤 올 것인가요! 만일 저희가 부당하다면 적어도 당신의 사랑하는 성교회의 간곡한 기도와 애원으로,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쏟으신 당신의 피를 기억하시어 가련하고 불쌍한 저희를 굽어보시기를 빕니다.”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시절인 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첫 번째 서한에서 기도하듯 쓴 문장이다. 고국에서 박해로 고통받는 신자들의 소식을 이역만리에서 듣고 함께 가슴 아파하며 신앙의 자유가 하루빨리 조선에도 찾아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목자의 모습을 신학생 시절부터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양업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고 두 번째 쓴 서한(절골에서 1851년 10월 15일)에는 “고해자가 2명이나 3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 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 순회의 모든 것을 끝마치고 새벽 동이 트기 전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최양업 신부가 박해자의 눈을 피해가며 단 한두 명의 신자들을 위해서도 묵묵히 걸어갔던 착한 목자의 발걸음이 생생히 전해진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는 성경말씀대로 산 사제가 최양업 신부였다.

대전교구 도앙골성지에 세워져 있는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도앙골은 가경자 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서한을 쓴 곳이다.

■ 눈물의 사제

1844년 5월 19일 소팔가자에서 쓴 두 번째 서한에서 “언젠가 좋으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의 동포들을 만날 행운이 저에게 다가오기를 하루하루 소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저의 동포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면 탄식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는 눈물의 사제이기도 했다.

1855년 10월 8일 배론에서 쓴 열한 번째 서한에서도 고통받는 신자들을 생각하며 비통해 하는 최양업 신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불쌍한 신자들은 거의 2년 동안이나 성사를 못 받고 안타깝게 선교사를 기다렸습니다. 이 가련한 신자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성사를 집전해 주지 못한 채, 실망과 탄식으로 우는 신자들을 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곤경에서 그들을 구해낼 방법이 전혀 없는 저 자신의 무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최양업 신부는 가련한 신자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고, 신자들은 최양업 신부를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렸다. 조선교회는 박해 중에도 최양업 신부와 신자들이 흘린 눈물을 자양분으로 삼아 성장할 수 있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시편 126,5)는 성경말씀이 최양업 신부를 통해 신앙 후손들에게 이뤄졌다.

■ 나라와 백성을 사랑한 최양업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양떼인 천주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널리 사랑한 사제였다는 사실을 서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50년 10월 1일 도앙골에서 쓴 일곱 번째 서한은 최양업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국내에서 쓴 첫 번째 서한이다. 이 서한에는 최양업 신부가 목도한 조정의 부패상과 학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 있다.

“지금 조선 조정은 수많은 당파로 분열되어 서로 헐뜯는 싸움으로 지새 나날이 쇠약해짐으로써 유달리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 관원들이나 포졸들이나 양반들이나 모두 하나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가렴주구에만 눈이 먼 약탈자들입니다. 가난한 백성은 1년 내내 고달프게 일하지만 겨우 온갖 종류의 세금을 내는 것이 고작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을 돕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2013년에 새롭게 공개된 서한(소리웃에서 1857년 10월 20일)을 보면 “확실한 것은 저들(프랑스 배)이라도 빨리 왔으면 하는 어떤 필연성이 충분히 납득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지고하신 섭리라 하더라도 말세가 아니고서는 믿지 못할 고질적인 그런 일들이 있는데 … ‘이제 거의 끝이 왔구나’ 할 정도의 완전히 전반적인 무질서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자체로는 어떤 치유책도 없어 보입니다.”

프랑스의 힘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하려는 최양업 신부의 생각은 정치적인 평가가 엇갈릴 수 있지만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만큼은 틀림없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