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사제단상] 모두 사랑하게 하소서/김승오 신부

김승오 신부 · 한국가톨릭농민회지도
입력일 2021-01-19 수정일 2021-01-19 발행일 1989-12-24 제 1685호 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언젠가는 없어질, 아니 곧 폐기되어야 할 국가보안법에 의해 신부 세 명이 구속되자 감옥소 안에서는 일제히 환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와! 우리와 함께 계실 신부님 감사합니다』한 여름의 무더위가 공안통치에 의해서 차갑게 얼어붙었는데 용감하게도 신부들이 스스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들어왔으니 동지를 만난 기쁨이 오죽했으랴.

그곳에서 같이 먹고 자고 얘기하고, 기도하면서 어느새 정이 들었는데 신부들이 형집행유예로 풀려나자 아쉬움만 남았으리라. 『신부님들이같이 계셔서 정말 맘 든든했습니다. 먼저 나가세요. 우리도 뒤따라 나갈께요』눈물 흘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손을 굳게 잡고 이 시대의 아픔을 깊숙이 느껴야만 했다고 한다.

신부들이 넉 달 열흘 만에 나오니 본당신자들의 기쁨은 또 어떠했으랴. 감사미사를 드리고 잔치를 베풀고 춤을 추고 기뻐서 눈물 흘렸을 것이다.

『신부님 정말 용감하셨어요. 우리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용서해 주십시오』눈물 흐르는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신부와 교우들 간의 신앙으로 맺어진 뜨거운 공동체를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 신부를 보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둔 채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길을 떠난 착한 목자의 모습이라고 얘기한다면 어떤 사람은 비판하겠지만 그러나 사실 아닌가?

임수경(수산나)양 가족은 얼마나 용기를 얻었을까? 무서운 통치자에 의해 죽음과 절망직전이었을 텐데 신부들이 딱 버티고 서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임수경양 가족을 구했고, 또 그 용기와 진실을 보고 본당이 기쁨에 넘쳤으니 한 마리 양을 찾아와 아흔아홉 마리 양과 함께 잔치를 벌여 이제 다 구한 것이 아닌가? 아마, 양 한 마리를 버렸더라면 아흔아홉 마리 양도 곧 잃어버렸으리라.

그리고 양 한 마리를 소홀히 여긴다면 아흔아홉 마리도 소홀히 여기는 것이리라. 하나가 귀중할 때 아흔아홉이 귀중한 것이다. 아흔아홉이 하나보다 우선일 때, 전체는 파괴되고 남는 것은 없다.

나는 그 신부들을 보고 왜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실 수밖에 없었다는 이해를 이번에 깨우친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안 되셨다면 인간과 무관한 하느님이셨으리라는 깨우침이다.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죄 많고 부족한 인간들 가운데 사시면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고 삶의 의미를 주신 것이다. 가난하게 사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고행을 택하신 것도 가난하고 고통에 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신부들이 구속되자 감옥소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듯이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 우리와 함께 계시자 인간의 환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1980년 5월, 공주에서 시작된 10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는 그야말로 혼돈과 갈등의 역사였다. 이 어두웠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최기식 신부님의 투옥은 상당한 은총이었다. 박종철 군의 죽음은 그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이었다. 87년 6월 민중들의 절규는 예수님의 피땀 흘리심과 매 맞으심이었다. 그 고통의 긴 세월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용기를 가졌고 희망을 잃지 않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이제 1990년대의 예수님성탄을 맞이한다. 다시 한 번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탄생하심을 기뻐하면서 어떠한 고통이 오더라도 용기를 내어 희망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주님! 당신 뜻을 따르게 하소서. 꼭 소원을 아룁니다. 문규현 신부님이 마지막 국가보안법의 석방자가 되게 하소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모든 사람들이 다 나온 뒤에 문 신부를 석방시켜 주소서!』

문 신부님은 나의 이 간절한 기도를 야속하다고 생각하실까? 아니다. 기뻐하실 것이다.

『나의 생각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것이 늘 부끄럽고 한스럽다』고 하신 이현주 목사님의 고백처럼 나 역시 내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문 신부님께 성탄 축하의 이 기도를 선물로 드린다.

김승오 신부 · 한국가톨릭농민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