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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단상] 성직자가 본 서울 세계성체대회 유감/변갑선 신부

변갑선 신부 · 대전교구 가양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0-12-29 수정일 2020-12-29 발행일 1989-11-26 제 1681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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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흠숭보다 교황존경 지나쳐

제44차 서울 세계성체 대회는 확실히 은총의 대회였다.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실천과 나눔으로 성체를 공경하며 주님과 이웃들과의 일치를 이루었고, 믿음과 사랑이 뜨거웠던 것은 사실이다.

실천을 더 중요시하는 준비를 갖춘 10월 8일의 폐막미사는 온 국민에게 교회의 산 모습을 보여주는 거룩한 행사였다. 우리는 이 대회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길이 보존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결실을 계속 거두기 위해 공정한 평가와 반성이 필요하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중략… 그가 네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리라』(마태오11.7~10).

1. 교황님과 높으신 분을 뵈러 갔었다. 우리는 교황님과 수도자들과 성직자들과 일반신자들을 보러 광장에 나갔었다. 많은 신자들에게는 일생 한번밖에 볼 수 없는 성체대회였고 교황님을 다시 뵈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이런 이유로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행사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교황님과 군중들 그리고 교회의 일치된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필자의 그릇된 관찰인지는 몰라도, 주님의 모습이며 대리자인 교황님과 교회를 보고 경외심과 존경심을 드린 것은 잘한 행위였으나 주인공인 주님께서는 다소 부족한 존경과 사랑을 받으시지 않았나 생각한다. 세자요한을 환영하러 나간 사람들이 세자요한이 증거하는 주님을 찾지 않았다면 주님은 대단히 섭섭했을 것이다.

여의도 광장에서 떡과 술을 바치고 축성하여 제사를 바치면서 십자가상의 제사와 똑같은 제사를 바친다는 것을 인식하고 온 국민의 아픔과 기쁨을 제물로 바치고 온누리에 축복을 비는 깊은 신앙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만일의 경우 신자들이 교황님과 군중을 바라다보는 흥분 속에서 정말 높으신 분을 외면했다면 말이나 되겠는가? 제일 높으신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운명하시고 제사를 바친 것을 잊고서는 참된 미사성제를 바칠 수 없기 때문이다.

2. 성찬과 직결되는 나눔의 미사. 이번 성체대회가 형식보다는 실천을 강조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많은 신자들이 나눔과 실천으로써 대회를 준비한 것은 사실이다. 한 가지 건의하고 싶은 것은 미사성제를 나눔의 실천으로 적극적으로 거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반 사회에서는 도시와 지방, 농촌의 빈부격차가 좁혀지기 어렵다고 한다. 성체의 자선미사로서 지방본당들이나 빈곤한 이웃들을 돕는다면 쓰레기 청소보다 몇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도시교구와 지방교구 본당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미사성제를 거행했었다. 그들 간의 빈부의 차이는 나눔과 자선의 부족으로 좁혀지지 않았으니 축복의 장애가 되었다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3. 질보다는 외형적인행사? 폐막미사와 같은 큰 행사에서 많은 신자들이 운집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나아가서는 세계성체대회에 오신 교황님을 모시는 행사를 치르는 동안 체면까지 생각해야 한다는데도 동의한다. 그러나 대회성공을 위해 질적인 면을 중요시해야 했다.

그날이 연휴였던 점과 5시간이상 대군중이 모여서 행사를 치루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내다봤어야 했다. 체육관을 빌려서 입장권을 발부 하고 노약자나 먼 곳의 교우들이 TV시청을 하도록 했다면 교통사고가 예방됐을 것이다. 13년 전의 필라델피아 세계성체대회는 여러 여건을 감안, 10만 여의 교우들이 모여 오붓하고 질서정연한 대회를 치루었다. 10만 명의 신자들 밖에는 모이지 않았다고 해서 주님의 영광이 삭감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불쌍한 양들을 덜 괴롭히고 덜 부상케 했을 것이다. 문제는 질보다는 양을 강조한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5년 전 2백주년 미사에 참석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고 온 어느 교우는 이날 TV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절약한 버스 값에 용돈을 추가하여 부모가 없는 학생에게 주었다.

어느 본당 교우들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기 때문에 대회에 참석치는 않았으나, 여의도에 참석하기 위하여 쓸 수 있었던 비용을 모아 나환자촌에 희사했다고 한다. 이런 예를 보아 이날 주님의 뜻에 따라서 거룩하게 지내고 축복을 받는 길은 여러 가지였다.

4. 대상자에게 맞추는 성체신비의 설명.

폐막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자뿐 아니라 성체의 신비를 믿지 않는 개신교 신자들이나 외교인들도 TV를 통하여 이날의 행사를 지켜보았다.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는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라디오나 TV에서 몸과 피라는 말은 너무 무분별한 표현이었다고 본다. 다른 신비도 마찬가지나 성체의 신비를 청중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제시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다.

성체의 신비를 모르는 청중에게는 성체를 희생과 일치의 상징이 풍부한 곡식과 음식의 뜻으로 제시했어야 할 것이다. 일찌기 아우구스띠노 성인께서도 예비자들에게 성체신비를 제시하실 때는 상징 정도만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5. 신명과 정서가 부족하지 않았는가? 교우들이 평소에 부르지 않던 창미사곡은 신앙표현이 너무나 미약했으며, 교향악단의 반주가 없었던 것은 감격이 부족한 대회가 되게 했다. 필라델피아의 세계 성체대회는 성가소리도 우렁찼고 장엄한 교향악단의 반주가 참석자들의 가슴과 하늘을 진동시켰다.

그곳에서 10만 대중이 영성체시에 두 손을 번쩍 들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병자들을 위하여, 애원하는 모습은 정말로 하늘이 열릴 만큼 힘차고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 축복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온전한 정신과 마음, 열렬한 신명과 손ㆍ발 온몸이 전인적으로 바쳐져야만 하지 않는가?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던가? 주님을 뵙는 이들의 마음은 실천적이고 기쁨이 충만한 환호 소리여야 하지 않는가?

변갑선 신부 · 대전교구 가양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