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사제 제언] 사형 제도 범죄 억제ㆍ법질서 확립 수단 못돼 / 추영호

추영호 신부<서울대교구 교도사목지도신부·사형제도폐지협의회 공동회장
입력일 2019-05-27 수정일 2019-05-27 발행일 1990-05-13 제 1704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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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존중 입각한 법문화 정립돼야
『나는 매일 매일 죽음을 준비해왔습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리며 그동안 인도하심에 감사드리며 그동안 저를 이끌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우리 형제들 오늘 누구 누구갑니까? 제가 맨 먼저 가니 먼저가서 기도해야지요』그가 남긴 마지막 말. 그는 웃으며 떠나갔다.

『내 손에 죽어간 생명들. 유가족들의 맺힌 한이 내 몸으로 떼워 주금이라도 풀어질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합니다.』그도 역시 웃으며 갔다.

감옥 안의 사도라고 불려지던 한 형제는 『오늘 해방의 날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옆에 함께 있는 담당 교도관과 신부인 나를 오히려 위로하며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감옥소가 아닌 새로 태어남의 못자리로서의 이 나라 교도행정 참다운 개선을 호소라는 말을 남기면서 사도처럼 떠나갔다.

평소에도 말이 적던 또 한 형제는 최후 진술에서 할 말이 없다며 끝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함께 기도하고 『주여 임하소서 내 마음에, 암흑에 헤매는 한마리 양을. 내 나아가리다 주 대전에 성혈로 씻으니 받아 주소서…』본래 노래가 서투른 그는 성가 151장을 끝까지 부르며 말없이 떠나 갔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들의 꽃 피었다 사라져 가는 것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떠나리라.

평소 좋아하던 성가 463장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몸은 조용히 떨렸다. 그 형제 역시 모든 이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면서 『집행관님, 제가 시간을 너무 지체해 죄송합니다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그는 성서의 시편 38편을 펴서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힘주어 읽어 내려 갔다. 『야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느님, 나를 멀리 하지 마소서. 내 구원의 주여. 어서 오시어 도와 주소서.』『저는 늦게 하느님을 알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죄 많은 제가 감히 한가지 바램이 있다면 지옥이 아닌 연옥에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나는 그에게 말했다. 『형제님, 예수님 말씀 기억하세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형제님은 천국에 가 계실겁니다. 형제님이 먼저 가시고 저도 나중에 갈텐데 저를 못만나시거든 전 지옥에 있는줄 아십시요.』『예이! 신부님 무슨 말씀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꼭 잡은 그의 손과 어깨에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웃으며 그러면서 그는 떠나 갔다. 얼굴에 보자기가 가리워지고 발목과 무릎. 두팔이 포승으로 묶여지고 하나 둘 셋! 하는 신호로 쪼그려 앉혀진 마루 바닥이 갈라져 꽈당! 하는 굉음과 함께 굵은 밧줄에 목이 매달려 늘어진 채.

이것이 지난 4월 17일 서울 구치소 사형집행 현장에서 5시간 동안 지켜 본 사형수 형제들의 최후의 모습이다. 이것이 평소 내가 알던 우리 형제들. 작고 어두운 감방에 아침 햇살이 들때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일까? 하는 죽음의 사신을 매일 매일 마주쳐야 하는 교통, 번민의 시간들과 싸우며 회심과 눈물의 크나큼 은총속에서 나날이 깊어가는 영성의 수련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맘을 헤아려 그분을 더욱 닮아 가던 그들이 죽음이었다. 참으로 의연한 죽음이었다. 용서와 감사에 찬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말짱한 정신에 두 눈 뜨고, 법과 이성의 이름을 빌어 『흉악범을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차근 차근 그들을 죽이고 있는 우리 모두를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럽게 하는 숙연한 죽음의 현장이었다.

그래. 그들이 한때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흉악범이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지금 아니 이미 흉악범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일지라도 그 생명 또한 박탈될 수 없는 존엄한 것일진대(사형제도는 네가 살인을 했으니 너도 죽어야한다는 복수의 원리 그이상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흉악범이 아니라 매일 매일 죄에 죽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 으로화진 생명을 몇번씩 잔인하게 살인한 것이다.

사형수 형제들은 예컨대 살인의 경우 자신이 저지른 살인 행위로써 스스로 이미 한번 죽는다. 나는 믿는다. 인간 본성의 악함과 인간 본성의 선함을. 인간은 본래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기에 인간성안에는 예외없이 선성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약한 본성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쉽게 파괴된다. 인간성의 파괴. 이것은 곧 죽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위 죽을 죄를 지은 사형수들은 자신의 행위로써 이미 한번 죽은 것이다. 이때 하느님이 원하신는 것. 그리고 그와 똑같은 부서지기 쉬운 약한 본성을 지닌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것은 더이상 죽음의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또 한번 그를 죽인다. 사형선고! 사형선고를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를 또 한번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아침 갑자기 형장에로 끌려가기까지 우리는 그를 매일 매일 죽인다. 사형집행날 그는 죽어간다. 더욱 기막힌 것은 세상은 또다시 그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에도 그랬거니와 지난 17일 사형집행후 일간지들은 한격같이 「흉악범 9명 사형집행」이라는 대문짝만한 제목아래 법무부 당국의 말을 인용, 최근 가정파괴사범과 강도ㆍ살인ㆍ강도강간ㆍ조직폭력ㆍ강간사범이 근절되지 않고 국민생활을 불안하게 하고 있어 이들 흉악사범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기 위해 사형집행을 단행하였다는 보도를 실었다. 친절하게도 9명 형제의 자세한 인적사항과 이미 7~8년전의 범죄사실과 함께.

7~8년전에 이미 그들은 우리 사회로 부터 죽임을 당했다. 그 후 그들은 죽음의 고통을 딛고 다시 태어 났고 (나는 그들 본래의 선한 모습을 되찾았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누구보다도 온전한 인간성과 희망의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들을 흉악범으로 몰아 또 다시 죽였다. 우리야말로 더 흉악한 실인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아버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까23.24)

정부 당국자들을 비롯한 우리 모두는 우리가 과연 누구를, 어떤 사람들을 죽였으며, 왜? 어떻게 죽였는지를 바로 깨닫고 알아야한다고 호소하고 싶다.

나는 이 짧은 지면을 빌어 새삼스럽게 사형폐지의 여러가지 법이론적 논거를 대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만 당국자들에게 분명히 지적하고 묻고 싶다. 사형폐지는 혁명적이론도 아니며 이미 선진화,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는 많은 나라(전세계 국가의 40%)에서 사형을 폐지하였고 세계적으로 폐지되는 추세가 늘어가고 있다. 특히 작년 1989년은 세계적 인권단체인 엠네스티 즉 국제사면위원회가 제정한 사형폐지의 해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지난해 89년 8월, 7명을 사형집행하였고 8개월만에 또다시 9명을 사형집행하였다. 법무부 당국의 말에 따르면(지난해도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이번 사형집행은 그동안 민생침해사범에 대한 정부의 강력대처방안에도 불구하고 날로 흉포화하고 점점 늘어만가는(작년보다 13.4% 증가) 강력사범에 대해 법질서를 확립하고 범죄자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겠다는 의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법무부 당국의 이 말은 말 자체로 볼 때도 모순을 범하고 있다. 작년 사형집행을 단행했는데도 강력사건은 줄지않고 여전히 더 늘었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결국 우리 사회의 강력범죄뿐아니라 모든 범죄는 사형과 같은 일시적이고 자극적인 극약 처방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대책이 있을 때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인신매매 가정파괴 등은 사람과 성이 상품화되고, 돈과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물신(物神)주의, 인간경시의 소위된 사회구조와 몰가치적 풍조의 산물임을 깨달을 때만 문제해결의 근본적 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인신매매하는 사람들(공급자)만이 범죄자가 아니라 인신매매의 동기를 유발케하는 사람들, 즉 성을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다고 믿는 사회풍조와 보이지않는 점잖은(?) 수요자들 역시 공범자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형제도의 존폐여부와 강력범죄의 증감은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다는 것은 이미 많은 나라.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검증되고 확인된 사실이다. 오히려 사형폐지후 강력범죄가 줄어들었다는 스웨덴같은 나라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인간경시, 생명경시 풍조는 국가가 또다시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로써 결코 치유될 수 없다. 국가가 먼저 여하한 사람의 생명도 존귀하여 박탈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랑과 생명존중에 입각한 법철학, 법문화의 올바른 풍토를 확립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인간의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것이기에 여하한 이유로서도(사형제도를 주장하느 사람들이 말하는 범죄억제효과, 국민의 응보적 감정해소 등 법질서 확립을 위한)수단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정부 관계당국에 호소한다. 다시는 이 땅에서 사형이라는 또다른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만일 죽어간 형제들이 무기형으로 감옥에서 일생을 보내도록 해주만 했어도 남은 일생동안 그 형제들은 그 안에서 보다 밝은 사회를 위해 우리 같은 성직자들, 교도관들 보다도 몇배, 몇 십배의 역할을 하고도 남았다는 것을 꼭 말하고 싶다. 실제로 그 중 특히 한 형제는 최고수들의 영신적 감화와 돌봄에 헌신적이었을 뿐 아니라 교도관들마저 그에게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교회에서는 그의 사도적 역할이 알려져 추기경님의 표창이 주어지기도 했다.

아울러 당국자에게 당부하고 싶다. 교정행정의 목표는 말그대로 교정 교화이며, 재생이다. 그런데 사형제도는 이러한 원칙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당국자들은 더이상 사형수들에 대한 신앙상담내지는 교화활동을 단지 그들이 편안하게 죽어가게 하는 잘못된 국가 제도의 서어비스 기능으로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천주교만 보더라도 특히 사형수 형제들에게는 성직다. 수도자. 어머니 봉사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그 인간적 관계란 어머니 자식간의 관계처럼이나 깊고 끈끈하다. 그런데 오늘은 서로 만나서 예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내일은 형장에 매달리는 형제들을 눈앞에서 보아야 하는 그 고통스런 심정을 이해하는가?

하느님은 사람을 고치시고 사람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한 한 사람의 죄인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사형을 인정하고 한 사람의 나머지 인생을 박탈하는 것은 곧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송두리채 빼앗는 것이며, 죽을 죄마저도 은총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활동과 그 사랑안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영역을 인간이 파괴하는 것이기에 사형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사형제도를 인정하거나 묵과하는 것은 곧 합법화된 살인행위에 동조하는 것이며 이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구속신앙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행위이다.

우리는 생명을 죽이며 하느님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죄인들에 대해 분노와 응징과 멸시의 차가운 눈길을 보내면서 예수마음을 말할 수 없다.

함께 더불어 사는 나라,하느님 나라는 곧 생명의 나라다. 이런 의미에서 사형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사형폐지운동이야말로 모든 생명운동의 출발이며, 예수운동의 근본임을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끝내 파괴될 수 없는 선한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인간존중, 그리고 우리 죄많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참 질서요 법이기 때문이다.

추영호 신부<서울대교구 교도사목지도신부·사형제도폐지협의회 공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