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한반도평화나눔포럼 특집] 분쟁 지역 교회 지도자들에게 듣는 ‘평화’ 이야기

서상덕 기자, 박지순 기자, 이윤아 수습기자
입력일 2016-08-23 수정일 2016-08-25 발행일 2016-08-28 제 3009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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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한반도평화나눔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벱싸라 부트로스 라이 추기경(중동 및 안티오키아 마로나이트교회 수장, 총대주교)과 빙코 풀리치 추기경(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대교구장),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 대주교(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 안톤 얌닉 주교(슬로베니아 루블랴나대교구 보좌주교)는 모두 민족과 종교 분쟁을 겪은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다. 이들 중동과 동유럽 발칸지역 교회 지도자들은 분쟁의 와중에도 신앙을 중심에 두고 교회와 교구민들을 지켜냈다. 가톨릭신문은 이들로부터 평화와 화해를 이끌어낼 지혜와 영성을 들었다.

■ 빙코 풀리치 추기경(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대교구장)

“평화 위한 대화로 희망의 불씨 살려야”

- 평화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다운 삶 강조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희망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이 없다고 좌절하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불씨를 살라야 합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대교구장 빙코 풀리치(Vinko Puljic) 추기경은 8월 18일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진리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과 교회가 어떻게 평화실현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풀리치 추기경은 우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서로 대화하기’를 제시했다. 대화는 상대방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도구라고 표현한 추기경은 대화를 할 때에는 일방적으로 한쪽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교환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추기경은 대화가 없다면 “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평화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 대화의 자리에 없다면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평화를 위해 대화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평화를 이룩하는 데 있어 ‘인간권리존중’과 ‘법 앞에 평등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 “정직하지 않으면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면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정직하기를 요청했다.

추기경은 보스니아에 있었던 내전과 평화협정 과정도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을 존중하고 희망을 증거해야 한다”면서 교회 차원에서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삶으로서 평화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풀리치 추기경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교회가 평화를 위해 많은 일을 해왔고 현재도 하고 있다고 밝히며 “교회의 역할 중 하나는 생명인 복음을 전파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보스니아가 미국이 중재한 데이튼 협정(Dayton Agreement)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한반도와 보스니아가 분단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했다.

특별히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진짜 평화가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며 “평화는 한 번 이루어졌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945년 보스니아 프리예차니에서 태어난 풀리치 추기경은 1970년 사제품을 받고 루비야 지역 탄광촌 주임 등을 역임했다. 1990년에 사라예보대교구장으로 임명된 후 1994년에 추기경 서품을 받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교회의 첫 추기경이 됐다. 추기경은 내전 중에 ‘화합과 용서, 치유’를 구현하며 평화를 이룩하고자 앞장서기도 했다. 현재 교황청 가톨릭 교육평의회 위원으로 재임 중이다.

<이윤아 수습기자>

■ 벱싸라 부트로스 라이 추기경(중동 및 안티오키아 마로나이트교회 수장, 총대주교)

“중동 지역, 하느님 사랑 가장 필요한 곳”

- ‘사도시대부터 이어 온 교회’ 자부심

벱싸라 부트로스 라이 추기경(중동 및 안티오키아 마로나이트교회 수장, 총대주교)은 “한국이나 레바논이나 한여름에 몹시 더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국의 더위에는 환대하는 마음과 따뜻함이 있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2016 한반도평화나눔포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라이 추기경은 비록 일주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지만 “한국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며 호감을 드러냈다.

라이 추기경은 한국교회에 대해 받은 인상에 대해 “서울 당고개와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박해를 용기 있게 이겨내고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순교자들의 피에서 신자들이 탄생하는 교회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라이 추기경은 한국 신자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중동교회와 관련해 “사우디아라비아나 레바논 등 중동교회는 이슬람 신자들보다 600년 먼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살았던, 사도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교회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고 밝혔다. “풍요로운 그리스도교 문화를 꽃피웠던 곳에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중동은 이슬람 세력이 우세하게 됐고 종교 분쟁 같은 여러 문제가 생겨났다”며 중동 지역이 처한 복잡한 종교적 배경을 풀이했다.

그는 “중동은 전반적으로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이고 종교와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이 최고법이자 사회법의 기본으로 여겨져 군사와 사법을 포함한 국가 모든 영역을 통제한다”고 말했다. 이어 “레바논은 다른 중동국가와는 달리 중동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국가와 종교가 분리된 정교분리 체제지만 국가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분리돼 있지는 않다”며 “국가가 하느님의 법을 어기지 않고 각 종교들은 서로의 종교법을 존중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이슬람화된 중동 지역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지역이고 나는 ‘중동의 그리스도인은 중동에 남으라’고 항상 말하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라이 추기경은 긴장과 갈등이 커져가는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 한국교회와 신자들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에는 직접적인 답변 대신 “레바논은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이슬람 신자들이 1943년 맺은 조약에 의해 대통령은 가톨릭에서, 국회의장은 이슬람에서 맡고 정부 각 부처에는 종교별로 공평하게 권리를 인정한다”고 답했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나눠갖는 방식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형식적, 기계적으로 보인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멋진 균형’이 없다면 레바논도 다른 중동 국가들처럼 혼란과 충돌이 야기됐을 것”이라고 했다.

<박지순 기자>

■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 대주교(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

“용서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어”

- 잘못에 대한 인정과 정직함 요청

“용서할 수 없다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용서는, 하느님 은총 없이는 힘든 일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우리는 주님 은총을 입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용서’를 외치는 평화의 사도가 됐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주최한 ‘2016 한반도평화나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8월 17~23일 6박7일간 한국을 찾은 스타니슬라브 호체바르(Stanislav Hočevar·71) 대주교의 첫 일성은 ‘용서’였다.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대교구장으로 사목해오고 있는 그의 조국은 같은 발칸반도 북서부에 있는 슬로베니아다.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면서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나라를 오가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평화를 향한 호체바르 대주교의 삶은 주님 뜻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이 가난해서 도저히 사제가 되기 힘든 형편이었지만, 매일 6㎞길을 걸어 성당을 오가던 소년을 부르신 분은 주님이셨다.

발칸의 화약고라 불리는 지역에서 나고 자란 그의 경험은 평화를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 1990년 살레시오회 슬로베니아 관구장으로 있으면서 ‘발칸인에게 평화를’이라는 평화 캠페인을 시작했다. 평화를 향한 그의 의지를 보셨을까, 2000년 베오그라드대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되면서 그의 삶은 평화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가톨릭이 다수이던 나라에서 살다 가톨릭이 5% 안팎인 나라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새로운 결심을 요구했다. 세르비아에 토착화하기로 한 것이다.

“내 곁의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갈 때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이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닐 때 평화는 이뤄집니다.”

그의 평화 체험과 의식은 역사적 연원이 있다.

“발칸에는 이미 사도시대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지금까지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평화도 이런 역사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도시대부터 이어져오는 복음화 열정을 되살려 주님이 바라시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다워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직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먼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속고 속이는 일이 반복되는 한반도, 이 땅에 평화가 사라진 까닭을 이국의 주교를 통해 듣는 아픔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서상덕 기자>

■ 안톤 얌닉 주교(슬로베니아 루블랴나대교구 보좌주교)

“평화와 일치의 여정 앞으로도 이어지길”

- “종교분쟁, 인간 이기심이 빚어내는 비극”

안톤 얌닉 주교(슬로베니아 루블랴나대교구 보좌주교)는 8월 17~23일 한국을 찾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가 주최한 ‘2016 세계평화의바람’에 참가한 소감을 묻자 “청년들과 함께하며 젊어졌다”는 말부터 꺼냈다.

얌닉 주교는 55세로 2016 세계평화의바람에 참가한 외국 주교단 가운데 가장 젊은 데다 국내외 청년들 90여 명과 ‘DMZ국제청년평화순례’에도 동행해 땀을 흘렸다. 그는 “평화와 일치를 위해 청년들이 걸어간 여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져야 하고 DMZ국제청년평화순례를 마련한 서울대교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이어 “순례라는 것은 인생살이와 같은 것으로서 편하게 지내지 않고 해야 하는 무엇인가를 지금 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참여하게 된다”며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젊은이들에게 여러 유혹이 있었을 것이지만 자유와 용기의 행동을 젊은이들이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계속해 “DMZ국제청년평화순례에서 알 수 있듯 걷는 것 자체인 인생에서 혼자 가면 불안하지만 함께 가면 힘든 여정도 오래 갈 수 있고 함께 걷는 과정에서 사람 사이에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얌닉 주교는 또한 “지금 시대는 돈으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고 인터넷을 통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원하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만 누군가의 옆에 있어준다는 가치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 “가족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아시아 교회에 예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번 순례에서 느꼈고 유럽 교회도 배울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2006~2009년 슬로베니아 주교협의회 가톨릭 교육 및 대학 담당으로 일하면서 2009년 슬로베니아 최초로 가톨릭계 학교와 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역임하며 청년사목을 담당한 얌닉 주교는 특히 청년들이 교회와 기성세대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했다. 그는 “아프리카와 유럽, 미국 등에서 온 청년들이 한국 청년들과 함께 무더위를 이겨내며 순례하는 모습에서 교회는 에너지를 발견할 뿐 아니라 신앙 안에서 모두가 이웃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고 밝혔다.

얌닉 주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종교 간 분쟁에 대해서는 “중동이나 동유럽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반복되는 종교분쟁은 표면적으로는 종교 간 갈등과 충돌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강대국들의 정치와 경제 논리가 숨어 있다”면서 “종교분쟁은 결국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빚어내는 비극”이라고 주장했다.

<박지순 기자>

서상덕 기자, 박지순 기자, 이윤아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