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부살롱] 고통의 의미/황 안나

황 안나·서울 장위동본당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3-15 제 1246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우리 주위에는 고통받는 이가 너무나 많이 눈에 띤다. 고통의 부피와 양상이 각각 다를뿐 모든 사람은 누구나 고통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것 같다.

고통없는 상태는 죽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인간의 숙명적인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우리 생애의 성괘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죽임이라는 무서운 고통을 뛰어넘고 환희 가득찬 삶에로 이끌어간 한예가 있다. 「일어나 비루어라」의 저자 오혜령씨의 경우이다. 이책이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일반에게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은 아니지만 가정주부의 잡다한 임무속에서도 이책은 이틀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을 때와 같은 박진감 같은 것을 느낀 때문이다. 특히 이책에서는 내가 필요한것을 간구하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려고 애쓴 노력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처절한 고통의 순간까지도 유우머와 윗트를 잊지않는 여유가 절실함을 더해주는 것같다. 마음의 변화를 읽어나가며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한 부분도 꾸며낸 애기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이책을 읽고 고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엇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 때문에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기 때문에 채찍질 하신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분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내십시오. 아버지로서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읍니까?

자녀는 누구나 아버지의 견책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런 견책을 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사생아나 다름없고 참 아들이 아닙니다. (히브리 12?6~8) 』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이 그리 크지않는 것이, 하느님께 덜 사랑받는 것 같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기에 모자란것 같아 오히려 불안하기 조차 하다. 기막히게 고통받은 오혜령씨가 부럽기까지하다. 그러나 새게는 정말 고통이 없는가? 지금 나는 완전히 평화롭고 기쁨속에 있는가? 그렇치 못하다. 나의 고통은 뚜렷한 이름도 없이 생활 구석구석에 자질구레하게 깔려 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고통, 주어진 임무속에서 하고싶은 것을 못할때의 고통, 물질이 궁핍할때의 고통, 타인의 무책임 때문에 당하는 고통, 부부간에 마음이 일치하지 않을때의 고통, 옳은 길로 가지 않는 자녀를 가진 부모의 고통, 친구의 배신, 시부모를 모신 며느리의 고통등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고통은 과연 암보다 덜한 고통일까? 어떤 의미에선 오히려 더 고질적인 것일지 모른다. 오혜령씨도 암이 완전히 물러간 뒤의 무기력함과 나른한 상태가 한창 극심한 고통때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고 쓰고 있다. 어디를 붙잡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방법이 잘 서지를 않는 고통들이다. 하느님을 믿고 주심을 따르는것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완전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이다. 어떤 여건이 내 마음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모든 여건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기적을 낳고 싶다. 돌같이 차갑고 단단한내 마음의 세포를 뜨겁고 부드러운 사랑의 세포로 바꾸어주는 기적을 간구드리고 싶다.

황 안나·서울 장위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