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입력일 2010-06-16 수정일 2010-06-16 발행일 2010-06-20 제 2702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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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영화이기에 앞서 한편의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를 보았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시’다. 배경음악이 안 나오는 이 영화는 강물 소리로 시작해 강물 소리로 끝난다. 영화 속 주인공이 생애 처음으로 쓰고 사라진 시가 낭송되는 가운데 윤슬을 반짝이며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클로즈업 시킨 마지막 장면은 죽음 앞에 섰을 때의 우리네 인생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중략) /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중략) / 이제 작별을 할 시간 (중략) /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중략) /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후략)’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의 이 시 한 편을 쓰기까지 그녀가 겪는 파란곡절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시처럼 아름답지도, 잘 이해되지도 않는 세상의 진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대속자(代贖者)’의 자세로 자기 삶을 던진다. 이혼한 딸의 아들인 손자를 데리고 파출부 일을 하며 살아가던 그녀는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 시를 배운다. 그러나 강물에 투신한 어느 소녀의 죽음에 다른 몇 명의 소년들과 함께 그 아이를 성폭행해 온 손자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가해자들도 별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도 않고, 그 부모들도 피해자의 유족과 합의란 명분 아래 금전적인 해결을 보기에 급급하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시낭송회 뒤풀이에 참석하게 된 주인공이 도중에 빠져나가 구석에서 처연하게 흐느낀다. 그것을 본 낭송회 멤버 하나가 묻는다.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시의 본질의 하나인 순수한 양심이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진 세상을 향해 반응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서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다. 그는 주인공이 가해자나 피해자보다 더 통렬히 아파하며 번민하는 과정에 관객이 자연스럽게 동화되도록 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묘한 가책감과 공분(公憤)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독의 기량은 그가 소설가 출신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영화 속에 뿌려진 여러 혼종 요소들을 서사적 능력이 확실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수의 솜씨로 장악해 꿰어 낸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이번 영화에서는 소설적이기보다 시적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영화의 제작 동기를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객들에게 그런 질문을 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인간에게 시가 왜 필요한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공자는 중국 고대의 시가집(詩歌集)인 시경의 본질을 ‘사무사(思無邪)’라고 정의했다. 시경의 시들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을 노래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과 감응하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사악함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의 기능을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해 감정적 정화(淨化)의 효과를 얻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전자는 시의 선한 본질을 얘기하고, 후자는 카타르시스라는 시의 기능적 측면을 얘기하고 있다. 이 두 철인의 생각을 하나로 꿰어 본다면 ‘시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어서 사람을 정화시킨다’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내 나름대로 답해 보자면 이렇다. 우리는 시대가 어떻든 시를 쓰고 읽어야 한다. 세상에 악과 불행이 넘쳐날수록 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 선한 것의 결정체인 시의 불꽃으로 우리 안의 악한 것을 태워버리기 위해, 또한 시의 정제된 눈물로 우리 안의 응어리진 것을 녹여버리기 위해. 그런 의미에서 ‘시’는 영화이기에 앞서 한 편의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