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던져진 돌’의 자유

입력일 2010-06-09 수정일 2010-06-09 발행일 2010-06-13 제 2701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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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본성의 필연성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집에서 기르는 토끼를 이따금 글감으로 삼아왔다. 한 번은 그 녀석과 주인인 나의 관계에 빗대어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는 글을 썼고, 또 다른 글에서는 그 녀석의 ‘우물 안 개구리’적 삶에 빗대어 나의 안이한 실존을 성찰해 보기도 했다. 개나 고양이와 달리 소리도 안 내고 사람의 정을 받치지도 않고 먹이만 있으면 혼자서 자족하는 이 독립적인 가축은 사람을 종종 철학적 상황 속으로 끌어 들인다.

생후 한 달 남짓 된 놈을 데려다 기른 지 삼년이 훌쩍 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기 적엔 암컷인 줄 알고 키웠던 놈이 어느 시점에선가 뚜렷한 수컷의 성징들을 드러내면서 나의 고민은 시작됐다. 실내에서 사람과 함께 지내던 놈을 털갈이며 배변 문제로 골치가 아파지자 현관 밖에 울타리를 치고 실외사육을 하게 되면서 이 고민은 본격화 됐다.

우리 집은 아파트 2층 복도 끝에 위치해 식구들 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 토끼는 제 ‘사생활’을 방해받을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집 앞에서 자유롭게 다니라고 울타리 문을 늘 열어 놓는데, 녀석은 타고난 호기심에다 수컷의 성질이 가세해 복도 전체를 제 집 마당삼아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 물론 콩알 같은 똥도 여기저기 흘리기에 전속 메이드인 내가 아침저녁으로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쓸어 모아야 한다.

우리 층 사람들이 녀석을 다 귀엽게 보아 탓하지 않으므로 그냥 내버려 두는데, 신기한 것은 복도 현관문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다리가 짧아 아래층 진출은 힘들다 치더라도 1미터쯤은 가볍게 솟구쳐 오르는 녀석이 위층으로 가는 계단 주변도 얼씬거리지 않는 게 정말 이상하다. 하여간 녀석은 제 활동 반경을 전적으로 2층 복도로 제한시키고 그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지낸다. 게다가 외로워선지 심심해선지 하루의 적지 않은 시간을 제 집보다 가운뎃집 테라스에 떡하니 앉아 현관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보낸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찡해 짝을 지어줘야 하지 않나 싶지만 토끼의 번식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중성화 수술이란 것을 시켜 짝을 지어줄 수는 있겠지만 ‘비인도적’이라는 생각에 그러기도 싫다.

즉, 우리 집 토끼는 자기가 던져진 비자연적 세계 속에서 자신을 적절히 적응시켜 나름대로 최대한 자유를 보장받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주요 권리인 번식할 권리가 배제된 그 자유는 기본적으로 자기결정권이 없는 빈껍데기가 아닐까.

‘나는 돌은 제 스스로 나는 줄 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 누군가의 ‘던짐’에 의해 날아가는 돌이 제 스스로 날아가는 것으로 착각해 사태의 선행원인을 무시하고 자유롭다 주장함을 빗댄 것이다.

자기 본성의 필연성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를 획득할 수 없고, 맹목적인 자유의 추구는 오히려 속박을 야기할 따름이라고 스피노자는 갈파했다.

우리 집 토끼는 제가 자유롭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나에 의해 ‘던져진 돌’일 뿐이다. 아파트 복도 내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며 제 편한 데로 지낼 수 있는 자유를 자기가 잘 처신함으로써 스스로 획득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선행원인은 주인인 내가 짝 지어 주기를 마다해서 저 혼자 지내게 되었기에 그 정도 자유라도 보장받는 것이다. 토끼가 두 마리 이상 되면 많아질 배설량이나 불편해 할 이웃 때문에 풀어놓지 못할 뿐더러 번답스러워 아예 사육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살면서 아닌 척 딴청 피우지만 결국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을 우리 집 토끼군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일깨운다. ‘던져진 돌’인 나는 날아가 닿을 종착지를 내 뜻대로 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