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골리앗은 죽지 않았다

입력일 2010-06-03 수정일 2010-06-03 발행일 2010-06-06 제 270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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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는다 하지만 골리앗 족속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골리앗이 다윗의 손에 어이없게 당하고 나자 필리스티아 군대는 진을 쳤던 유다의 엘라 골짜기에서 퇴각했다. 본영으로 돌아온 그들이 장수 회의를 소집해보니 아군의 전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너져 있었다. 다윗의 승리로 기세등등해진 이스라엘군에 파죽지세로 격파 당하고 남은 병사의 숫자가 겨우 천 명 남짓이었다. 무력감에 빠진 장수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막사를 지키던 보초병이 들어와 보고를 했다.

‘골리앗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어린 소년이 마을에서 올라 와 대장님들을 꼭 만나뵈야 한다고 떼를 쓰는데 어떻게 할까요?’

‘골리앗 투사의 아들이라고?’

장수들은 호기심이 일어 소년을 들이라 일렀다. 곧이어 막사 안으로 한 아이가 타박타박 걸어 들어와 장수들이 빙 둘러 앉은 앞에 섰다. 이제 겨우 열 두어 살이나 됐을까 싶은 홍안에 골리앗의 핏줄로 봐줌직한 별다른 특징도 없는 아이였으나 눈빛 하나만큼은 무쇠도 꿰뚫을 듯 날카롭고 강렬했다. 소년이 호소했다.

‘저를 다윗의 진영에 보내십시오. 제가 혼자 숨어 들어가 다윗을 죽이겠습니다.’

둘러앉은 장수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수군거렸다. 잠시 후 병사에 이끌려 억지로 퇴장당하는 아이 뒤를 따라 평소 골리앗과 친분이 있던 장수 하나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는 굴욕감에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말했다. ‘골리앗의 아들아, 나는 네 복수심과 의분을 이해한다. 나한테만 살짝 네 감춰진 생각을 일러줄 수 있겠느냐?’

소년은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굽혀 소년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댄 장수의 얼굴에 놀라움과 착잡함이 뒤엉킨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수십 년이 흘렀다. 어느 날 다윗왕은 도읍인 예루살렘 남서쪽 해안 지역에서 수상한 동향이 감지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의 마지막 정복전쟁 이후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던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은밀히 다시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윗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가 곱이라 불리는 곳에 이르러 보니 과연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다윗의 부대는 야간 기습을 해 그 마을 사람들을 무차별 도륙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후 어느 날 밤, 다윗은 혼곤한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문득 섬뜩한 기운을 느껴 눈을 번쩍 떴는데, 침대 위에 드리워진 휘장 너머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베개 밑의 비수를 집어 들었다. 곧이어 그림자가 바람처럼 날래게 침대로 다가왔다. 다윗은 그림자가 침대 발치의 촛대를 잡는 순간 벌떡 일어나 그 손목을 낚아챘다. 지난 몇 달간 다윗의 잔심부름을 해오던 시종 아이였다. 다윗은 진저리를 치며 외쳤다.

‘너는 누구냐?’

‘나는 당신 군대가 몇 달 전 곱에서 쳐 죽인 필리스티아 투사, 골리앗의 아들이다.’

‘네가 나를 해치고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오늘 죽는다. 하지만 당신을 치러 오는 우리 골리앗 족속 사람들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응대를 마지막으로 소년 골리앗은 촛대를 재빨리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촛대의 불이 아이의 몸에 순식간에 옮아 붙는 걸 보자 다윗은 얼떨결에 손을 놓았다. 그 틈을 놓칠 새라 화급히 달려드는 아이를 피해 다윗은 몸을 굴려 침대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아이의 옷 속 맨살에 발라 놓았을 피마자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소년 골리앗의 장렬한 분신을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어째서 수십 년 전 그 어떤 날 밤 야영하던 막사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궁내 호위병들이 들이닥쳤을 때 다윗왕은 넋 나간 얼굴로 자꾸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거인 골리앗을 나, 기름부음 받은 자, 다윗이 물리쳤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