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나는 왜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가!

입력일 2010-05-26 수정일 2010-05-26 발행일 2010-05-30 제 2699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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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사소한 것들에 분노하느라 날마다 새로운‘큰 일’들에는 무감각하다
엊그제 택시를 타고 가다 옆 차로에서 굴러가고 있는 ‘집 한 채’를 보았다. 그냥 시시한 주택이 아닌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 한 채였다. 상상 밖의 얘기를 듣고 멍한 표정이 되었을 게 분명한 내 얼굴을 백미러로 살피며 기사 아저씨가 덧붙였다. “저걸 타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딱 둘인데, 한 사람은 30대 의사이고, 또 한 사람은 이름 대면 다 아는 재벌 2세라네요.”

M뭐라는, 이름도 제대로 외워지지 않는 그 독일제 자동차의 수입가격은 무려 14억. 정말 ‘억’ 소리 나는 숫자인데도 나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의 의아해하는 눈빛이 느껴져 얼른 농담조로 눙쳤다. “그 친구들, 집에 갈 시간이 없나 보죠?” 하지만 나는 내 안에서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정체모를 분노를 삭이느라 그 차의 대단함을 설명하는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차비를 서둘러 치르느라 오백 원을 거슬러 받는 것도 잊은 채 그냥 내리고 말았다. 그러고서는 평소 비밀 저금통에 넣기 위해 ‘편집적으로’ 모으는 오백 원짜리 동전을 놓친 것이 아까워 한숨짓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또 화가 났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김수영 시인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서 독재 권력의 비리를 상징하는 ‘왕궁의 음탕’ 대신 설렁탕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자신을 그렇게 반성했다. 정말이지, 요즘은 나도 사소한 것들에 분노하느라 날마다 새롭게 화면과 지상을 가득 메우는 세상의 ‘큰일 난’ 것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감하다. 아니, 무감하고 싶어 한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처럼, 나도 세상의 온갖 거짓말에 면역이 생겨 위기상황이 닥쳐도 실감을 못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잠재된 불안 의식은 어떤 형태로든 표출될 출구를 찾다가 사소한 일에 투사되어 때 아닌 분노나 슬픔의 분출로 나타나는 것 같다.

무농약 재배 상추라고 사온 것이 이틀 만에 곤죽이 되고, 드라이클리닝 맡긴 점퍼가 코트로 매겨져 세탁비를 더 내고, 반시간이나 기다린 버스가 내릴 사람 없다고 서지도 않고 가버리고, 프린터에 이면지를 넣었더니 ‘재밍’(jamming) 돼버린 채 멈춰 서 버리고, 볶음밥을 만들려고 모든 재료를 다 준비해 놓았더니 식용유가 딱 떨어져 없고…. 말하기도 짜증날 정도로 사소한 일들에 나는 언제까지 분노하며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영양결핍증을 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영적 독서도 하고, 성경도 늘 읽고, 존경하는 신부님들의 말씀도 가까이 찾아 듣고 하는 편인데, 어째서 그럴까? 순간, 한 생각이 머리를 친다. 비우기, 그것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학인이 영적인 스승을 찾아가 지혜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스승은 아무 말 없이 학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잔이 넘쳤지만 그는 계속 따랐고, 차는 흘러넘쳐 방바닥까지 적셨다. 기분이 상한 학인이 소리쳤다. “뭐 하시는 겁니까? 잔이 넘치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말했다. “자네는 이 찻잔과 같아 생각과 주장과 계획과 욕망으로 흘러넘치지. 자네가 빈 찻잔처럼 완전히 비워지기 전에는 내가 어떤 지혜를 부어도 흘러넘치고 말거야.”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학인처럼 나도 영적 양식을 받아 채우기엔 쓸모없는 것들로 너무 꽉 차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영적으로 만성 영양결핍이 되어 작은 자극들을 의연히 버텨내지 못하고 과민하게 반응하며 불필요한 소모를 일삼는지 모른다. 정작 세상을 망가뜨리는 큰 문제들에 맞서 제대로 분노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소한 소모를 피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득 의아해진다. 앞서 목격한, 30대 젊은이가 모는 14억짜리 자가용에 대해 내가 느꼈던 분노는 어느 쪽일까? 감정의 색깔도 좀 복잡했지만, 아무튼 사소하게만 볼 수 없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