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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명의 마음소풍] 미니픽션이 필요한 시대

입력일 2010-05-19 수정일 2010-05-19 발행일 2010-05-23 제 2698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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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말해도 충분히  말한 것 처럼 삶이 미니픽션같이 간결해졌으면
문단에 몸담은 지가 십 수 년 되다 보니, 여기저기서 보내오는 책이 많다. 지인들의 신간은 물론 구독도 안 하는데 계속 오는 문예지들, 전혀 모르는 이들이 보내오는 책들, 거기다 아직도 타계 사실을 모르는지 선친 앞으로 보내오는 책들까지 보태져 한 달 평균 열 권을 넘는다. 책의 내용이 훌륭해서든, 보내준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든, 대략이나마 소화해야 할 책들과 더불어 내가 필요로 구해 읽게 되는 책까지 합하면 만만찮은 분량이다. 그런데 근시에 덮친 노안과 집중력 부족으로 독서력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다. 그러면서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내가 종사하는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갖는 자체적 문제점이다.

소설은 길이에 따라 단·중·장편으로 구분되지만 단편이라도 200자 원고지 70~100매 이상인 만큼, 길어야 5매 안팎인 시나 대체로 10~20매인 수필과는 분량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권 이상 분량의 장편이나 십 수권에 이르는 대하소설까지 얘기하자면 독자에게 부과되는 독서의 총량은 엄청나다. 물론 길이로만 독서의 무게를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술술 읽히는 대중 소설이라도 최소한 반나절은 잡아야 끝낼 수 있기에 소설은 일단 ‘시간 잡아먹는’ 물건이라고 봐야한다. 더 문제인 것은, 읽는 데 반나절 걸리는 쉬운 소설도 쓰는 데 최소한 수개월 내지 일 년이 걸린다는 점이다. 이른바 난해한 ‘예술 소설’을 쓰기로 정평이 난 한 작가는 3부작 장편을 하나 쓰는데 17년이 걸렸다고 한다. 한 권 분량 쓰는 데 5년 이상 걸린 노작(勞作)이니, 쓰는 이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이런 작품은 그야말로 괴물 급 ‘시간 포식자’다.

요즘 장편 집필에 착수한 나로서도 이따금 회의가 든다. 천신만고 끝에 생산해낸 작품이 책으로 묶여 나갔을 때 과연 그것이 남들 인생의 한정된 소중한 시간을 ‘잡아먹어도’ 좋을 만큼 가치 있는 무엇이 될 것인가? 그러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열정에 사로잡혀 글을 쓰다가도 이따금 이런 회의가 스며들면 한동안 작업을 진척시킬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욕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시인의 자질을 타고나지 못한 내게 시는 대안이 되어 주지 못한다. 이럴 때 내가 수년 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 하나를 불러 마음 가는대로 같이 좀 논다. ‘미니픽션’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다.

미니픽션은 한 화면 또는 지면에서 간편히 읽을 수 있는 짧은 소설이다. 한 두 줄로도 핵심을 찔러 묘미를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장르인데, 그 좋은 예 하나가 스페인 작가 후안 호 아바네스의 「결말」이란 작품이다. 작가가 생애에서 가장 짧은 단편을 쓰고 있었을 때, 죽음 역시 가장 짧은 작품을 쓰고 있었다. “이리 와.” 지금은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있는 장르이나 초기에는 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성행해 보르헤스와 같은 스페인어권 대가들이 명편을 많이 남겼다.

우리 문학전통에서도 고려시대의 설(說), 조선 후기의 소품문(小品文) 등 미니픽션의 사례가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더 거슬러 올라간 고대에도 미니픽션의 대가들은 있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와 당대 도반인 사복이 주고받는 말에서 초 절정(?) 고수의 솜씨를 목격하게 된다. 원효가 “나지 말 것을, 죽는 것이 괴롭나니. 죽지 말 것을, 나는 것이 괴롭거늘.”하고 말했을 때, 사복은 “말이 많구나.”하더니 이렇게 고쳐 받았다. “죽고 낢이 괴롭고녀!” 그러나 역사상 최고의 미니픽션 작가는 단연 예수님이다. 그분의 놀라운 비유들을 떠올려 보라!

볼거리, 들을거리, 읽을거리 넘쳐나는 이 시대, 삶이 미니픽션처럼 좀 간결해졌으면 싶어 나 자신에게 주문한다.

덜 말해도 충분히 말한 것이 되게끔 표현의 공력을 쌓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