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구자명의 마음소풍] 무함마드의 기적

입력일 2010-04-14 수정일 2010-04-14 발행일 2010-04-18 제 269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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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지 않는 산에 실망해 돌아섰다면 실체와 만날 기회는 영원히 없었을 것이다”

“산이 안 오면 내가 가야지.”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그가 참 예언자임을 증명하는 기적을 행해 보라는 사람들의 요구에 산을 옮겨 보려 했다가 실패하자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실 이슬람 경전 코란에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묘사가 적잖이 들어있는 반면, 정작 코란을 계시 받아 전한 무함마드의 기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기본적으로 우호적이며 코란에서 성모의 동정잉태와 예수의 기적을 인정하고 추앙할 뿐 아니라 예수재림설마저 다수 학파에서 수용하는 입장이다.

일부 극단 세력들이 보이는 배타적인 성향 때문에 이슬람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 중에 그런 것도 있다고 이슬람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에서 4대강 사업을 우려하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의견과 관련해 교회의 입장을 비판하는 한 지식인의 글을 읽었다. 교회가 ‘하느님의 일’이 아닌 ‘카이사르의 일’에 나서기 시작함으로써 ‘가톨릭다움’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무함마드의 일화가 떠올랐다. 무함마드는 무슬림들에게 아브라함, 모세, 예수에 이어 마지막 선지자로 더없이 추앙받는 존재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위치에 머물렀고, 그 스스로도 그 점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된 상황에서도 자조적 유머(?)를 발휘하며 스스럼없이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오히려 비범성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정부가 사회 각계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추진 의지를 보이고 있는 4대강 사업은 마치 일부의 요구가 있어 공연히 한번 시도해 봤으나, 결코 일어나지 않은 무함마드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무함마드에게 기적이란 것은 그의 권능과 정명(定命) 밖의 일이기에 애당초 일어날 수도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그것처럼, 창조주의 영역인 한 나라의 모태적 자연에 대해 한낱 인간의 시스템에 불과한 정부가 있지도 않은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허망한 발상이다. 정부가 이제라도 무함마드처럼 마음을 비우고 자연을 움직이려하기보다 자연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한다면, 오히려 역사에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산 옮기기’ 일화에서 무함마드가 보여줬던 태도는 우리가 서로 상이한 의견으로 각기 제 의견에 집착해 도무지 합의점에 이를 전망이 안 보이는 현상에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적용시켜 봄직하다는 생각이다.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실용주의니 이상주의니 하는 갖가지 대립항들이 제각각 날 세운 목소리를 동시다발로 내지르는 통에 그 어느 한 소리도 제대로 귀에 꽂히질 않는 시대다. 이럴 때 무함마드처럼 아주 단순하게 접근해 보는 거다.

다가오지 않는 상대는 어차피 산과 같은 것. 천년이 가도 움직이지 않을 고정체인 것이다. 빨리 포기하자. 그러면 움직일 주체는 나밖에 안 남는다. 어차피 합의가 도출되어야만 세상 일이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자존심도 상하고 자기 신념을 저버리는 것도 같아 스스로에게 화도 나고 낭패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도리가 없잖은가.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수많은 ‘나’가 제각각 수많은 ‘너’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걸 보게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그 수많은 ‘너’ 역시 ‘나’를 고정체라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나는 너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가정을 복잡다단한 실제 현실에 적용시키기에 너무 순진한 발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다가오지 않는 산에 실망해 그대로 돌아섰다면, 산의 실체와 만나볼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자신이 산을 향해 가는 동안 위대한 알라께서 슬그머니 산을 움직여 주실지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