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잘 살아보려는 욕망과 희망이 있다. 그래서 오늘의 고생 괴로움 모욕을 참아가면서 힘든 경쟁 속에 뛰어들어 몸부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사회가 발전되고 복잡해질수록 인간은 가치 판단의 혼란과 위기에 처해 어쩔 바를 모르고 방황한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과학의 발달은 과학이 최고의 가치요 우상의 대상이 되었고 고도로 발달된 기계 문명은 기계가 세계의 주인이 되었고 또한 황금(돈)이 사람보다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는 현실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과 기계와 황금이 신을 증명해 주고 인간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알았지만 더욱 복잡하게 꼬여 들어가고 있으며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세태가 되어가고 있다. 또한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 오는 이웃과 사회를 모르는 부의 편중 속에서 현대 종교는 기를 못 펴고 멍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일이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할머니가 약국을 찾아와서 살구씨 한 봉지를 내밀면서 주인에게 사줄 것을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 한약방으로 안내해 드렸드니 10원 받고 돌아오기에 더욱 호기심에 그 돈 10원을 무엇에 사용하시려 하는지 여쭈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그 돈 10원으로 손주 자식에게 국수라도 사서 저녁을 먹여야 한다는 말씀에 재삼 놀라고 한편으로 나의 마음을 찌르는 무엇을 느꼈다. 이보다 더 비참한 현실이 없으랴만 나는 이와 같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또한 이웃 형제들에 비해 과연 돈 10원을 정당히 사용하였는지 깊은 반성을 해본다. 10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돈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할 때 그 할머니와 또한 가난하여 굶주린 이웃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나는 커다란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술집에서 몇천 원도 아깝지 않게 팁으로 아가씨 가슴팍에 꽂아주면서 또 별볼일 없이 다방에 앉아 이 친구 저 친구 커피 값을 내주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은 일은 없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 개를 미장원에 데려다 화장시키는 데 일금 5천 원. 스켈링(치석 제거 구강 청소하는 것) 하는 데 3천 원 주고 있다는 것을 보고 정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한 자기 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쓰는 일이 없었을까? 단돈 10원으로 한 끼의 주린 배를 채우는 사람에 비해서 낭비는 정말 죄악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기막힌 현실이다. 죄란 것이 반드시 어겼을 때만이 죄일까? 깊은 회의 속에 빠져버린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자기 능력대로 최대한 절약하여 이웃을 도울 때 이 어려운 현실을 이겨나갈 줄 안다. 더 좋은 방법이 또 있을까?
나는 어릴 때 절간에 가서 맑고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떠서 마시고 남은 것을 버렸을 때 스님의 꾸중을 들었다. 이때는 그 꾸중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얼마 전 기독교 모씨의 농군학교 교육 생활상을 보도한 기사에서 얼마나 절약을 강조하는지 보고 놀랐다. 세면장에서 사용하는 비누를 남자는 세 번 여자는 네 번 문질러 쓰도록 하고 또한 치약까지 몇 미리 이상 사용 금지를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한 가치의 담배 한 잔의 커피 등 일상생활 속에서 절약을 생활화할 때 개인은 알차고 사회는 바르게 되고 국가는 강해지리라 생각된다.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 그 가운데서도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한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무관심은 곧 사랑이 없는 증거이며 사랑이 없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세상의 제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7절) 하였다. 이와 같이 형제애로써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그러나『쓰고 남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러므로 능력대로 남을 도와 개인이나 국가가 자립하고 발전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사목헌장 69조) 라고 하였다. 어느 누구가『하느님의 뜻은 금전 절약이 아니라 자선 행위와 사랑의 마음씨에 있다. 사랑이 없이 고행만으로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고 믿는 것은 흉칙한 바리세이파의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면 내 스스로 없다고만 하지 말고 바로 내가 절약하여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한다. 그때에 이 세상의「하느님 왕국」은 우리에게 더욱 가까워질 것을 확신한다.
독자 논단은 애독자 여러분의 차지입니다. 교회 내의 건설적인 제안이나 비판이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2백 자 원고지 5~10매 정도. 채택된 분에게는 소정의 고료를 우송해 드립니다.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편집자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