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는 얼음처럼 차거운 바람이 불어와 고민에 쌓여 화끈거리는 내 두 뺨을 순식간에 얼어 붙였다. 흐렸던 하늘은 어느새 맑았고, 달빛은 창백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많은 별들이 빤짝이며 춤추고 있는 듯 보였다.
옆 고지에 적의 포탄인지 아군의 포탄인지 몇 발이 떨어져 불꽃을 날리며 작열(作裂)했다.
아,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살려야 할 사람을 살릴 수 없는 무능한 나 자신이 미워졌다. 그리고 김 상위와의 대화를 한마디 한마디 내 마음 속에 되새겨 보았다. 그때까지 공산주의자라면 종교를 말살하며 특히 우리 교회를 박해하는 용서할 수 없는「적」으로 나는 생각해 왔었다. 민족적인 면에서도「여수ㆍ순천 반란사건」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방화와 살인을 일삼는 민족 반역자라고 나는 늘 들어 왔었다. 그런데 김 상위의 고매한 사상과 신념과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은…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칭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인간 삶의 현실적 부조리와 사회제도의 모순성과 사회 정의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또 순교자의 태도와 같은 그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 의식 앞에 나는 깊은 존경을 아니 바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루까복음에 나오는「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하며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비교해 보았다. 천주님을 독점물처럼 생각하던 유대인의 사제들과 장로들, 그리고 이단자라고 멸시 받던 사마리아 사람, 그러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이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과연 오늘의 누구일까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Quo Vadis」그 옛날 베드로 사도는 순교하기가 무서워 도망가다가 다시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로마」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들었다.
오늘의 우리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복음의 생명인「사랑」을 외면하고 있지 않나를 생각해 보았다. 이 현실의 빈곤과 악과 불의 앞에 또한 인간의 슬픔과 고독과 멸시와 분노와 희생 앞에 우리들이 무감각한 상태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천주님을 떠나 교회를 버릴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십자가를 지시고「골고타」산 언덕을 올라가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붉어져 가는 세계 지도가 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거기에는「예수 없는 십자가」가 보였다. 십자가는 온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과 이 사랑 때문에 받은 고난의 상징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인간 개개인을 구제하시고 계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주체이신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절반에는「예수 없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즉 거기에도 인간 구제를 위한 사랑이 있고, 이 사랑을 승화시키는 희생이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이 계셔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안 계시니 이는 과연 누구의 탓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생각할수록 마음만 괴로워 왔다. 적의 포탄이 나 있는 곳 가까이 떨어졌다.
교통호에 엎디어 작열하는 포탄의 파편을 피했다. 그때 잠바 주머니 안에 넣어 있던 내 오른손은 열심히「묵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성모경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나는 김 상위를 위하여 묵주신공을 바치기로 했다.「환희의 신비 5단」과「고통의 신비 5단」을 하고「영광의 신비 1단」을 묵상하며 성모경을 염하고 있을 때 나는 별안간 김 상위를 무사히 살려 낼 수 있는 방법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마음 속에 느꼈다. 그것은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