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인간의 가장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윤리문제 중 하나다.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는 성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그 진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일 것이다. 특히 현대인의 뇌리에 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날로 더해가지만 그 관심은 보다 더 성 본능의 만족을 추구하는것 같은 방향으로만 흐를 뿐 인간은 왜 그렇게 강렬한 성 본능을 지니는 것이며 그러한 성의 의의는 무엇인가를 규명해보는 사색은 점차 약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이에 본보는 지난 10월 6일 대구 가톨릭문화관에서 열린 경대 가톨릭학생 주최「성의 윤리」주제 강연(김길수 교수) 내용을 발췌, 성의 본래 목적과 그 의의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편집자 註>
인간의 성 본능은 자연적 기본 능력의 하나로 그 자체 근본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나 그 진정한 의의에 따라 통어되지 않을 때 인간의 품위를 격하시키고 말 것이다. 사실 성만큼 그 저변이 넓고 복잡하며 미묘한 윤리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이 다루는 모든 존재의 가장 보편적인 생각이란 공동 영역에서부터 신학이 다루는 인간 완성과 행복의 극치인 사랑의 완성이란 숭고한 영역에까지 가장 미묘하고도 강하게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도 하거니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그실 하나도 같을 수만은 없는 매 사항의 개별성 때문이기도 하다.
흔히들 현대를 일컬어「성 범람의 시대」라고들 한다. 과연 오늘의 당면한 이「성의 범람」성의 물결 같은 이 현상은 언제 어떻게 물결쳐 왔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의 물결이 공공연하게 된 것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다. 금세기 초까지 그리스도교화 된 서구권에서나 유교정신으로 무장된 동양에는 성욕ㆍ감정ㆍ본능적 충동 따위의 억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또는 점잖은 자리에서는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매우 급격하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하루 아침에 일어났다. 특히 성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은 성과학연구소 소장이던 히르쉬멜트의 지휘 아래 성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순결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어떤 종류이던 성행위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은 원시적 전 시대의 유물이며 현대에는 성취 불능의 무용지물이거나 부담스러운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배격하였다.
또 예술적 표현의 문제에서도 성의 과잉 노출은 시작됐다. 즉 성문학 누드작품 그리고 각종 출판물에서도 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오늘의 사회는 예술이 대중화함으로써 예술적 감각도 그만큼 일반화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예술의 영역에다 어떤 도덕 내지는 윤리적 제약을 도입하는 데 강경한 반발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순결교육은 전 시대의 유물이고 현대에서는 성취 불가능한 문제일까? 그리고 점잖은 인간이라고 해서 과연 성적 충동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여기에서「성적 충동의 깊은 의의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교회는「성본능은 그 자체로서 훌륭하고 축복받은 좋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충동과 성능력이 뭤 때문에 왔으며 왜 느끼게 되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란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본능 즉 그 관능적 쾌락의 욕구가 강하고 충동적인 점을 알아야 하는 점이다.
성본능의 충동성과 맹목성은 인간에게 기필코 이루어야 할 성본능의 원래적 목적의 완성을 위해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있어서의 양성즉 남성과 여성은 상호 우열 비교관계가 아닌 보완적 관계로서 각기 고유한 특성과 품위를 갖고 완성을 향한 동반자가 돼야 한다. 또 이 양성은 인간이란 공동 바탕 위에 있으므로 서로 품위를 침투시켜선 안 되며 성의 본래적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성의 본래적 목적에의 봉사는 억제와 영화로써 양성에게 순결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양성이 만일 성의 본래적 가치와 품위를 외면하고 새 인격체인 생명의 창조로부터 감각적 쾌락을 떼내어 남용할 때 이는 인간의 행복 추구의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며 자연에 대한 거역이며 윤리가치에 대한 폭행이다.
여기서 성의 과잉 노출과 공적 표현현상이 생기고 성범죄가 범람하고 성윤리 기준이 모호하여 판단력의 혼란을 초래케 된다.
그러므로 양성은 항상성의 본래적 목적을 상실해선 안 된다. 성 능력은 곧 하느님이 주신 생을 완성시키는 힘이며 인류 존속과 번식을 지향하는 능력이다. 성의 충동성과 맹목성은 본래의 목적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숭고함은 바로 성의 본래적 목적과 가치를 지향할 때 성립된다. 따라서 우리의 순결은 모든 역경을 이기고 본래 목적에 기여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더욱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양성은 항상 적당한 조절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알 것은 수치심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내면의 문제를 숨기려 한다. 특히 성적 수치심은 개인적 사회적 수치심보다 더욱 강하다. 이 수치심이 본래 사명에 기여할 수 있도록 개발돼야 한다.
이 감정은 인간이 가진 본래적 사명과 그 가치를 갖게 하는 최초의 감정이며 자기 방어이기 때문이다. 이 성적 수치심을 포기함은 윤리 가치에 대한 폭력이며 생명 원천에 대한 모욕이며 혼인과 가정을 이루기 위한 축대를 파괴하는 것이며 바른 성적 품위와 가치를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행위는 어디까지나 생리와 인격의 일체 속에서 결합돼야 한다. 서로의 영혼이 결합 못 될 때는 관능적 쾌감은 느끼겠지만 그 후는 허무 공허 모욕을 느낀다.
끝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영적 존재로서 인격 완성에의 초대에 응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성의 의미와 목적을 사랑에 넘친 하느님의 창조 및 구원 계획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성본능을 제대로 통어하고자 한다면 결혼과 사랑의 견지에서 이것을 봐야 한다. 결혼과 사랑만이 성이 갖는 참다운 인간적 특성을 터득케 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