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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청소년 운동/이성우 신부

이성우 신부ㆍ대구 계산동본당
입력일 2020-02-12 13:26:59 수정일 2020-02-12 13:26:59 발행일 1977-08-07 제 106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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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행군운동에서 점차 소년단으로 발전

개인주의 탈피, 공동체적 의식 갖는 게 특징
기술 및 자료면서 정부나 교회의 도움 커
지방 단위로 전문가와 지도신부가 전담
8년 전부터 대구교구 등 여러 교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하계 산간학교가 서양에 있는 청소년운동을 도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체계를 가지고 있는 그들의 청소년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문제성이 많은 산간학교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 믿는다.

각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독일에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대개 1900년부터 청소년운동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엔 단순히 도보 행군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1901년 11월 4일에는「반데르 포겔스」(Wander Vogels)라는 청소년 단체를 처음으로 결성하게 됐다.

그리고 1차대전을 전후하여「자유 독일 청소년」이라는조직적인 운동의 모체가 생겼고 그리고 1930년부터 소년단으로 통합 발전시켰다.

청소년운동의 정신적인 배경을 이루는 이념은 처음에는 젊음을 표시할 수 있는 생동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차 인문주의나 니체 등 당대 철학과 문학사조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고유의 생활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순수하고 자연스럽고 정직하고 자발적이며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연 속에서 자기가 자신을 교육하는 청소년운동의 이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것에 반하여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을 취하게 된 것이 또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발달과정에서 교회의 청소년운동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청소년운동으로서 그들은 성서그룹를 발전시켜 성서를 연구하고 생활하는 성서 중심 생활을 청소년운동의 핵심으로 발전시켰고 둘째로 가톨릭 교회는「퀵보론」이나「새로운독일」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쇄신과 특히 공동체적인 교회의 예절 혁신과 그리스도 중심주의 같은 신앙교리의 중점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2차대전 후에는 생활과 여건의 변화로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점에 봉착했다.

따라서 교회는 청소년 사목이라는 방대하고 새로운 사목 분야에 눈을 돌리게 되고 사목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청소년사목의 현장은 물론 본당이다. 그러나 본당으로 청소년을 위한 모든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방 단위의 교회들 (Dekanet)이 청소년 담당 지도신부를 모시고 있고 각 교구는 정부 기구와 마찬가지로 청소년청을 가지고 있다.

이 청소년청에 전담 지도신부와 전문가들이 교구의 일련 청소년 지도자 및 각 개별팀의 다양한 수련 프로그램을 작성한다.

그리고 초교구적인 조직으로는 이것은 주로 자료 제공이나 편의를 봐주는 역할로 전문가들을 두고「뒤셀도트르」의「소년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제정적인 보조는「청소년 보조」와 같은 여러 가지 기구들이 정부나 교회에 있어 어느 때 어느 프로그램을 이행할려고 하든지 언제나 격식만 갖추면 그의 3분지 2 이상을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기술적이고 자료적인 문제는 그의 1백% 정부나 교회의 도움을 받는다. 참으로 행복한 조건 속의 청소년 운동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은 너무나 전제주의적이고 기계적이며 군대식 집단생활 방식에 회의를 갖는 것 같다.

그래서 비인격화되고 기계화되는 현실에서 벗어나 적은 소그룹 중심의 청소년운동을 더 바라고 있다.

지도자가 7~8명의 단체를 인솔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즐기면서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참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건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전례생활의 깊은 뜻을 경험하며 성서생활의 기초를 익혀나가는 것이 새로 형성되어 가는 교회의 새로운 청소년운동 양상인 것 같다.

이성우 신부ㆍ대구 계산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