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고(故) 오기선 신부 사목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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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일 2019-07-01 13:53:14 수정일 2019-07-01 13:53:14 발행일 1990-08-12 제 171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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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현양에 바친 “평생”
일재하 첫 한인교구장 탄생 주역
복지활동도 심혈… 문화훈장 수상
지난 7월 30일 우리곁을 떠나 고인이 된 오기선(요셉) 신부는 회갑을 지낸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젊음과 웃음을 잃지 않고 20년이상 끊임없이 활동해온 행동가였다. 1971년 6월 3일 서울 대방동본당 주임을 끝으로 일선에서 은퇴한 오기선 신부는 은퇴 후에도 약20년간 은퇴이전과 변함없이 의욕적으로 활동, 「만년 청춘」소리를 들어왔다.

본인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웃으면서 살았다. 해맑은 그의 웃음은 언제나 그를 나이보다 젊게 만들었다. 또한 그의 밝은 웃음은 이지적인 용모에 비해 편안하고 서민적인 풍모를 느끼게 해주는 요인이었다. 1907년 11월 5일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상하리에서 출생한 오기선 신부는 1932년 12월 17일 사제로 서품된 후 일제치하, 해방과 6ㆍ25동란 등 1940~1950년대 격동기 한국교회의 주역이었다.

사제서품 후 서울 중림동 보좌, 혜화동주임을 거쳐 서울교구장 비서 재임시 일제감시하에 단신으로 도일, 주일본 교황사절과 담판,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를 탄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을 침략 합병시킨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 선전포고 후 서울교구를 비롯 전국 각 교구장 주교들에게 사임 압력을 가하면서 일본인 주교 옹립을 기도하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오기선 신부는 1941년12월 25일 당시 주 일본교황사절을 면담, 한국교회에 한국인 주교 임명의 당위성을 역설, 이듬해인 1942년 1월 3일 당시 서울 명동본당 보좌이던 노기남 신부가 서울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그해 12월 20일 노기남 신부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가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오 신부는 주일본 교황사절과의 담판시 불어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해외유학을 하지 않은 오신부가 독학으로 체득한 불어로 주 일본 교황사절을 설득한 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 신부는 1943년 평안북도 압록강변에 위치한 신의주본당 주임 재임시 전쟁에 광분한 일제가 신의주성당의 종헌납을 강요하자 일본인 고등계 주임과의 담판을 통해 신의주성당의 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일화는 주일본 교황사절과의 담판과 함께 오 신부의 넘치는 기지, 뛰어난 협상술과 판단력, 넘치는 열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제서품 후 서울(중림동 혜화동 대방동), 평안남도(안주), 평안북도(신의주), 충청남도(대전)에서 사목활동을 해온 오 신부는 일선본당 사목활동 40년 가운데 절반이 넘는 23년간을 대전에서 활동하였다.

44년 대전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오 신부는 1947년 충남에서 직영하던 고아원을 인수, 애육원이라 개명하고 원장에 취임, 충남 사회사업연합회장을 11년동안이나 역임하며 6ㆍ25동란 전후 뛰어난 사회사업가로도 활약, 「고아들의 대부」로 불리었다.

이 같은 공로로 오 신부는 196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오 신부는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문필가였다. 「어려운 소재를 쉽게 재미있게 하라」는 성예로니모의 금언을 강론의 철칙으로 삼은 오 신부는 수식이 없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 평범한 말속에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비범한 강론가였다.

오 신부는 회갑 및 사제서품 50주년 기념문집인「곡예사 같은 인생」,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외에도「교리실화」「교회의 어머니」「수도자의 모범이신 예수」「사랑의 학문」등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겼다.

오 신부는 중앙방송국(1935~1939년)과 KBS라디오(1945~1976년)에서 35년간 종교방송을 담당한바 있는 숨은 방송인이기도 하며 자가용운전면허(1949년 3월)를 취득한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으며, 하나 밖에 없는 아우인 오기순 신부(전주교구ㆍ은퇴요양 중)가 1941년 3월 23일 일본 동경주교좌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것은 한국인 최초의 형제신부 탄생으로 기록되고 있다.

1937년 9월 28일 혜화동본당 주임재임시 오 신부가 프란치스꼬 제3회 회원으로 입회한 것 역시 한국인 신부로서는 처음이었으며, 그해 12월 25일 서울프란치스꼬 제3회 형제회를 창설, 한국가톨릭에 프란치스꼬 제3회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1971년 6월 3일 대방동본당 주임을 끝으로 은퇴한 오기선 신부는 103위 한국복자 시성추진위, 2백주년 기념사업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순교 선열들의 유해ㆍ유적지 발굴 및 현양 사업에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다.

1987년 3월 2일 한국성지연구원을 설립, 원장 겸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6월 27일 순례단을 이끌고 중국대륙을 방문, 상해에 김대건 신부 동상, 북경에 이승훈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7월 11일 귀국, 곧 바로 병원에 입원한 후 20일만인 7월 30일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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