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를 회고하여 가장 큰 삶의 지혜를 주고 가신 분으로 이장규 박사님을 회고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큰 기쁨입니다.
내 영혼이 몹시 앓던 죽음의 공포와 내 정신이 만신창이로 상처받았던 사별의 애통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치유와 화평으로 이끌어 주신 분이라 하면, 얼마만큼 고마운 어른이신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1978년 8월에 나는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학위논문으로「한국 문학에 나타난 죽음 의식의 사적 연구」와「죽음 의식을 통해 본 소월과 만해」두 저서를 발간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이 학위논문의 출판으로 인하여 나는 1978년 10월에 이장규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늬날이나 다름없이 학교에 출근하였는데 조교가 메모를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출근 즉시 원자력병원 원장 이장규 박사에게 전화를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분을 전혀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과 긴장과 기대의 복합 감정에 쌓여 전화의 다이얼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이장규입니다』라고 답하시는 그분의 어질고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들었을 때,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전화를 주셨다고 해서요…어쩐 일이신지…』
그분의 내 긴장을 풀어 주시기 위하여 의례적인 인사말을 다 생략하고 이렇게 즉 본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교수님의 학위논문 두 편과 또 다른 두 편의 죽음에 관한 번역서를 읽었습니다. 언더라인을 쳐가며 정독했고, 초판이라 오자가 많이 나서 일일이 교정해 놓았으니까 제 책을 재판 때 교정본으로 사용하시고 새로 나올 재판을 저자 싸인해서 제게 증정해 주십시오.』
나는 너무도 고마와서 숨이 막힐뻔 했었습니다.
『바쁘신 원장님께서 송구하게도 그 여러권의 책을 다 읽으셨다니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내 대답을 받아 박사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수님. 의사도 아닌 문학도가 우리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달리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어, 교정본을 만들어 드리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이 책을 드릴테니 우리 병원에 오세요. 괜찮으시다면 원장 차를 보내겠습니다. 제가 서울시내의 제일 낭만적인 곳에서 제일 비싼 불란서식 점심을 대접하겠습니다. 곧 차를 보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만나러가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사뒤에 있는 원자력병원에 도착하여 기사의 안내로 이층 원장실에 가서 비서가 원장실 문을 열었을 때였습니다. 방안은 클래식 바이얼린 선율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가 놀라운 바이올리니스트임을 나는 그 현장에서 알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미끈한 신사들 몇분이 이미 모여 앉아 박사님의 바이올린 연주에 심취되어 있었는데 방안에 들어서는 나를 분명 보셨을 터이건만 끝까지 연주를 마치신후, 백년지기나 만나신 것처럼 박사님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교수님! 오늘은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여러분계시니 불란서 요리는 차후로 미루고 오늘은 우리 모두 냉면으로 점심을 때워야 하겠습니다.』그래서 그날은 방문객들때문에 냉면으로 불란서 요리를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선생님은 찾아 오시는 방문객들에게 평생 점심 대접하시는 것을 큰 기쁨으로 알고 사신다 했습니다.
언제이던가 나는 선생님께서 왜 내 책을 좋아하시는 지를 여쭈어 보았는데 글 속에 깔려 있는 건전한 가톨릭 정신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선생님도 가톨릭교회에 관심을 가져 보시라고 했더니『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데 나는 예수님처럼 살 수 없고 내 처자식을 위하여 사는 개인주의를 벗아날 수 없으니 영세 입교할 수 없어요. 그러나 죽을때에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예수님같은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이니, 임종시에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이웃에 복음을 전하여 선교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지만, 돌아가실 때에 세례를 받으면 복음선교의 공로를 쌓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씀 드렸으나, 선생님은 복음을 못 전하는 불충보다는 예수님처럼 살지 못하는 불충을 저지르지 않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철저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 사별의 애통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불가피한 정신질환이라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였는데, 불치의 진단을 환자에게 이야기해 주는 일에 대하여는 나의 개인적 의견과 정반대의 견해를 박사님은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선 의사가 죽음에 이를 병을 진단하여 환자에게 발설하면 인간은 누구나 거부의 단계를 겪습니다.내가 그런 흉한 병에 걸렸을 까닭이 없다고 거부하면서 그것이 오진이라고 말해줄 의사를 쇼핑하러 돌아다니며 재산을 물퍼붓듯 써버린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분노의 단계에 들어섭니다. 왜 허구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내가 그런 병에 걸렸느냐고 격분하면서 건강한 가족이나 동료들이나 가까운 친지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세째는 타협의 단계입니다. 생명을 6개월만 더 연장해 주시어 막내 자식혼인하는 것만 보고 죽게 해 주시면 하느님 성전 건립기금으로 상당액을 봉헌하거나, 자선 병원을 지어 바치거나, 전 재산을 공익사업에 헌납하겠다는 등. 여러가지로 생명의 연장과 재산의 봉헌을 놓고 흥정을 벌이는 단계입니다. 네째로는 절망의 단계에서 갈등을 겪은 후,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단계에서 평화스러운 신앙적 수용의 단계를 맞이합니다. 죽음이 하느님께 귀의하는 평화스럽고도 성수러운 정신치유의 단계에 도달하는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환자에게 암에 걸렸음을 통고하는 일은 너무도 무자비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불치의 암에 걸렸음을 통고해 주는 일을 거절하는 휴머니스트가 이 세상에 한 사람만 남는다면 바로 그 한사람이 선생님일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모두가 정직한 통고를 겁내고 말하지 못하는 편에 서고 오직 한 사람만이 불치의 암에 걸렸음을 통고하여 미리 죽음을 준비하도록 해 주는 편에선다면 그 오직 한 사람이 바로 나일 것이라고 힘주어 주장해 말씀드렸었습니다. 선생님은 그처럼 철저한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처럼 착하신 어른이 세례를 못 받고 비신앙인으로 살다가 그냥 돌아가시면 정말 복음선교의 공은 쌓으실 수가 없겠다고 아쉽게 생각하면서 살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다가 몇 해가 지난후 귀국하여 학교 수업에 임했던 몇해 전 어느 봄날3월27일 조간신문을 읽던 때였습니다. 나는 그만 너무도 놀라 흑 하고 흐느끼었습니다. 이장규 박사님께서 폐암으로 임종하시었는데 3월28일에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 주례로 영결미사를 집전한다고 보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도 놀라 다음날 그 시간에 수업이 있기 때문에 참석할 수가 없어서, 어느 신부님께 미사예물을 봉헌하고 그날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수업시간동안 시종일관 나는 선생님 생각이 나서 평상시처럼 강의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왜 사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장수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무엇인가? 나눔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등등 이장규박상의 삶의 통해 내가 체험한 삶의 인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통하여 내가 배운것은 첫째, 착하게 사는 삶의 순간과 순간이 모여서 완벽한 삶을 형성하고, 완벽한 삶을 산사람이 완벽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완벽한 임종을 맞으셨고 그것은 평생을 식사때 만나는 모든 사람과 식사를 나누신다는 그의 일상적인 작은 덕행들이 축적되어 가져다 준 축복이었습니다. 둘째로 임종에 이르러 세례를 받았으므로 복음선교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가를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삼천명이 참석할 수 있는 명동성당을 가득 채운 조문객들이 김수환 추기경과 다른 여러분 사제들의 공동집전 미사의 장엄함을 보면서, 분명 가톨릭 장례 의식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런 장례예절에 대한 호감을 지니고 돌아 갔을 터이니, 착하게 살았던 분은 죽어 시체가 되어서도 무수한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가슴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죽어 시체가 되어 누워서 복음을 전하셧던 것입니다.
장례가 끝난 며칠 후 꿈에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남산 위에 교회를 세우고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신축중인 교회로 나를 안내하시면서 기사에게 3시 수업이 있으니 그 전에 와서 학교에 모셔다 드리라고 일렀는데 정말 그 시간에 선생님은 나를 깨웠습니다. 깨어보니 3시. 두 딸 아이가 공부방에 피어 놓은 연탄난로 가스에 쓰려져 있는것을 발견하고 겨우 생명을 구했었습니다.
이장규 박사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내 영혼과 정신의 아픔을 치유해 주신분. 죽어 꿈속에 나타사셔서도 나를 도우시어, 자식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어른이십니다. 3월 26일을 나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